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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5화 (25/92)

25화

내가 바라지도 않는 것들을 해 주겠다고 하면 받아들여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나는 에르긴을 마음속에서도 잘라 낸 후였다.

“바라지 않아요, 에르긴.”

“미엘린…….”

설마 진심이었던 거야?

에르긴의 눈동자에 빗금처럼 생채기가 나는 것이 보였다. 에르긴이 입술을 달싹이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양새가 상처를 잔뜩 받은 듯 보였다.

진심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 몰랐어.”

에르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이토록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고. 내가 멍청했어. 미엘린……, 내가 정말 잘못했어.”

에르긴이 고개를 숙였다. 내 앞에서 저렇게 작은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에르긴에게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다. 약간의 연민조차도 말이다. 그저 영화를 보는 듯 덤덤한 심정이었다. 마음속에서 에르긴을 덜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와 내게 동화된 미엘린조차도.

그에게 일말의 미련조차 생기지 않았다. 내가 에르긴에게 바라는 바는 그가 충분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한 데 대가를 치르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가 저지른 죄를 깊이 통감하고 느끼는 것. 그걸 바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또한 미련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감정은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처럼 오롯이 분노만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떡하라는 건가요?”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저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미엘린!”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에르긴을 피해서 몸을 틀었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혀를 차갑게 차고는 덧붙였다.

“더러우니까.”

짙은 혐오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에르긴이 눈을 홉떴다.

“미엘린……!”

손을 굽히는 에르긴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에르긴. 돈 때문에 그래? 이미 에르긴의 밑바닥을 봐 버린 나로서는 저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소설에서 에르긴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는 서술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세리나를 위한 그리고 아이반에 의한 소설이었으니 말이다.

추후 아이반이 세리나를 대신해서 에르긴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만 언급되어 있었다.

더 이상 에르긴을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손을 붙든 채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돌아섬과 동시에 시끄럽게 떠들었다.

저들 중 일부는 나를 악독하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상관 없었다. 이건 내 삶이었고 에르긴은 내게 있어서 완벽한 악역이었으니 말이다.

“잘했어.”

크리스티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를 안 이래로 오늘 제일 잘했어.”

“말이 좀 과했나 했는데.”

그게 진심이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주 적당했어. 저런 쓰레기에게는 그 정도 말도 부족해. 욕을 해 주려다가 네 위신을 생각해서 참았다고.”

크리스티나가 귀엽게 말하고는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재판이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이 전부 법정 안 자리에 앉았다. 에르긴은 내가 한 말이 충격적이기라도 했는지 넋을 놓고 있었고 그를 변호할 변호사들은 자료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차피 에르긴이 어떻게 나올지는 변호사들과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해 보았다. 우리 예상에 의하면 배심원단을 저격하여 동정심 유발 작전을 쓸 가능성이 커 보였다.

조금 전에 나를 붙들고 했던 이야기들도 그런 계획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그냥 각자 갈 길 가자는데 그게 어렵나?

혀를 작게 차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배심원단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클로린에 의하면 이번 배심원단 선별에 헨리 왕의 입김이 다수 작용했다고 들었다.

에르긴 또한 헨리 왕을 만났을 테지만 이번에 왕은 내 손을 들어 줄 것이다. 계약에 따라.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그저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에르긴과 법적으로도 얽힐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한 후련함과 설렘만 남았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아이반과 내 눈이 마주쳤다.

이건 에르긴과의 끝이기도 하지만 나와 아이반이 새롭게 나아가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 * *

“속 시원한 얼굴이네?”

“당연하지. 오늘만 기다렸다고.”

“저녁은 아이반 공작과 먹는 건가?”

“오늘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니 식사를 대접해야 마땅하지.”

어깨를 으쓱했다.

예견했던 대로 재판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 에르긴은 수십 장에 이르는 편지를 읽으며 동정심을 유발하려 애썼지만, 배심원단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날 증인을 자처한 귀족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데다가 이미 왕이 개입한 재판이었다. 에르긴이 세리나와 임신을 논할 정도로 깊은 관계였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게다가 세리나를 집까지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도덕적, 윤리적 지탄까지 받았다. 게다가 내 자산을 이용해서 세리나에게 물품을 사 주고 돈을 준 정황까지 확인되었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클로린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웨스턴과 함께 에르긴의 온갖 비밀을 알아 오는 한편 크로세타 저택에서 일했던 하녀들 두엇을 매수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에르긴의 불륜을 입증해 줄 증거만 넘쳐나게 된 것이다. 에르긴은 가지고 있는 자산 대부분을 내게 돌려주게 되었다. 막대한 위자료를 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클로린은 에르긴의 변호사와 합의를 통해 내가 바라던 대로 지분 대신에 돈으로 돌려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으로 에르긴과의 연결 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게다가 재판 말미에 헨리 왕의 칙서를 든 시종장이 등장했다. 아주 극적인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헨리 3세는 이번 재판을 통해 타레이나 왕국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시는 이런 추문으로 법정을 더럽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여, 나는 이번 일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에르긴 크로세타와 세리나 세르미온의 결혼을 명하는 바이다.]

그 뒤에도 긴 이야기가 있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헨리 왕이 왕의 직권을 이용해 두 사람의 결혼을 명했다는 것. 에르긴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늘어뜨린 채로 서 있었다.

에르긴과 세리나라니.

원래 끼리끼리라잖아.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렸다.

“둘이 결혼할 때 화환이라도 보내 줄까 봐.”

“좋은 생각이야.”

크리스티나가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리가 제일 먼저 법정에서 빠져나온 터라 아이반을 기다리기 위해서 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을 피하지도 못할 때, 그 누군가가 내 손목을 움켜쥐고 당겼다.

“꺄아악!”

내 비명과 크리스티나의 비명이 뒤섞였다.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 누군가는 바로 눈이 붉게 충혈된 에르긴이었다. 내 어깨를 움켜쥔 에르긴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이것 놔요!”

“이거 못 놔? 정신병자 같으니라고! 어디서 행패야!”

크리스티나가 노성을 터뜨리며 에르긴의 손목을 내게서 떼어 냈다. 하지만, 에르긴은 밀려나는 대신에 크리스티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크리스!”

에르긴이 내 허리를 움켜쥔 채로 제게로 당겼다. 발버둥을 치는 내 턱을 붙들고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네가 내 여자라는 걸 보여 주면 왕께서도 그런 명령을 철회하시겠지!”

“이것 놔, 미친 새끼!”

발버둥을 쳐도 에르긴은 장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쳐도 곱게 미쳐! 이거 못 놔?”

혀를 밀어 넣으면 그것을 물어 잘라 낼 각오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아아악!”

에르긴의 손목이 확 젖혀졌다. 꾸득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팔근육이 뒤틀린 듯했다.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아이반이었다.

“감히 어디에다가 손을 대는 거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크로세타 백작?”

“이것 놔! 네가 내 아내를 홀렸지? 미엘린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혼하라고 부추긴 거야!”

“말이 통하질 않는군.”

“……아이반 공작님.”

나도 모르게 안도감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곳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뻔했다는 분노와 모욕감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힘의 우위에 떠밀려 원치도 않은 행위를 당할 뻔한 것이다.

내가 우는 것을 본 아이반이 이를 뿌득 갈았다. 이런 일이 아이반에게 용납이 될 리가 없었다. 아이반이 에르긴을 밀어 넘어뜨렸다. 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은 에르긴이 팔을 붙든 채로 엉성하게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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