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내 아내 내놔! 미엘린을 내놓으라고!”
아이반이 에르긴의 멱살을 붙든 채로 질질 끌고 나갔다. 아예 밖으로 에르긴을 던져 버린 아이반이 경비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에 힘이 풀린 나는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렸다.
이전처럼 연출한 상황이 아닌 진짜로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도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에르긴이 저 정도로 짐승처럼 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크리스티나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이제 괜찮을 거야.”
“빌어먹을 개새끼……. 흐어어엉…….”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런 걸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미엘린이 가엽다. 언제든 제 수가 틀리면 폭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망종이었다. 저런 놈을 가족이라고 믿고…….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요. 크로세타 백작이 눈 뒤집힌 거 보셨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부인은 괜찮은가 몰라.”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다가와 내게 숄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가 그것을 받아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숄에서는 따뜻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제야 내가 덜덜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추워 보여서요.”
흐릿한 시야로 귀부인의 얼굴이 비쳤다.
“……흐윽…….”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일까지 겪어야 하는 건지. 허탈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에르긴과 엮인 것 자체가 저주스럽다. 그런 인간과 살 맞대고 살아온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나조차도 더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 팔을 바득 끌어안았다.
“집에 가자…….”
“그래.”
크리스티나가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기분 좋게 아이반과 저녁 식사를 이야기하던 것도 전부 잊은 채로 나는 인체스터 저택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을 가득 받고 그 안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아이반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고 홀로 돌아왔다. 아이반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바보.
아이반에게 말이라도 하고 돌아왔어야 하는 건데.
욕조 난간에 목을 기댄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퉁퉁 부은 얼굴이 느껴졌다. 하도 울었더니 몸에 힘도 없었다.
“아이반…….”
아이반은 재판 내내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아이반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만들어진 판에서 배우들이 연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아…….”
게다가 에르긴의 폭력에서 나를 구해 준 것도 아이반이었다. 눈이 반쯤 돌아 미치광이처럼 굴던 에르긴에게 덤벼들어 제압해 주었다. 다른 이들은 도와야 함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에르긴의 추태가 엄청났다는 말도 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미친놈은 평소보다 힘이 몇 배는 세진다는. 그런 상황에서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든 거였다.
“미안해서 어떡하냐…….”
그러나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물이 식을 때까지 있다가 욕실 밖으로 나온 내가 본 것은 침실에 있는 거대한 디저트 산이었다.
“저게 뭐야……?”
“아이반 공작께서 보내신 거.”
크리스티나가 내 머리를 직접 수건으로 말려 주며 대답했다.
“네가 걱정되셨나 봐.”
“하…….”
아이반에게는 아직 해 준 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고 있었다.
“다녀갔단 말이야?”
“응. 네가 씻는 동안. 에르긴 크로세타는 경비대에 구금되었다고 들었어. 아이반 공작님이 그자를 경비대에 직접 넘기셨다니까 한동안은 못 나올 거야.”
“……그랬구나. 아이반은?”
“저택으로 돌아가셨지. 네가 괜찮아지면 연락 달라고 하셨어.”
크리스티나가 수건을 내려놓고 테이블을 침대 앞까지 끌어 주었다. 손을 뻗어 툭 튀어나온 쿠키를 집었다. 입 안으로 밀어 넣으니 단 향이 훅 끼친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냄새를 맡고 있자니 내가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올라왔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배가 고픈 것이 신기했다.
“밥 먹을래?”
“아니. 이걸로 충분해. 우유만 있으면 좋겠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녀가 침실에서 나갔다. 어느 정도 마른 머리카락을 뒤로 편하게 넘긴 채로 다음 쿠키를 집어 들었다. 하나둘씩 먹다 보니 배가 조금씩 찼다.
뻑뻑할 땐 꿀을 넣어 데운 우유를 잔뜩 마셨다. 크리스티나는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 배부르다.”
“……이제 괜찮아?”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에르긴 따위가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멍이 이 주는 갈 거래.”
“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얼굴에도 멍이 들어 있었다. 에르긴에게 붙들렸던 허리와 손목도 멍으로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있던 사이에 의사도 다녀간 모양이었다.
내 손목을 본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그런 개 같은 인간이 다 있는지. 정말로 괜찮은 거 맞지?”
“……응.”
어차피 상처는 낫는다. 에르긴 따위로 끙끙대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다. 자신을 그렇게 설득하는 중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더 이상 에르긴하고 마주할 일조차 없을 거라고 말이다.
정말로 괜찮아질 때까지 나는 세뇌를 계속했다.
떨리는 손이 멎을 때까지.
* * *
아이반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이반은 지금 인체스터 저택 앞에서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아이반이 타고 온 말이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에르긴에게서 미엘린을 바로 구해 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지켜 주기로 약속한 미엘린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이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미엘린에 대한 걱정으로 이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좀 더 빨랐더라면, 좀 더 강했더라면 미엘린은 다치지 않았을 거라며 아이반은 자책했다. 쓰러진 미엘린의 멍든 손목을 보는 순간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할 것이다.
미엘린이 다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편이 나았다. 아이반이 아픈 한숨을 내쉬었다.
디저트 가게를 찾아가 단 음식들을 잔뜩 사 모으면서도 이런 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도 스타티스의 추천에 따르면 우울할 땐 단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놀란 듯했지만, 다행히 아이반이 가져온 것을 받아 주었다. 아이반이 에르긴을 경비대에 넘기고 인체스터 저택에 왔을 때 미엘린은 진료를 받고 있었다.
분명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정신은 없는 것처럼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치의는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잠시 그렇다고 했지만…….
“후우.”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내일 연락을 주겠다는 말에 나오기는 했으나 이 앞을 떠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렇게 서성거리던 아이반이 돌아간 것은 꽤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인체스터 저택의 불이 거의 다 꺼진 직후.
* * *
세리나에게도 헨리 왕이 내린 명령이 전해졌다, 절망에 빠져 있던 세르미온 남작 가에는 마치 축제가 벌어진 듯했다. 아무리 에르긴이 세리나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어도 가문 차가 있다 보니 에르긴이 세리나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엘린까지 인연을 끊었으니 돈 나올 구멍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헨리 왕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세리나는 이제 크로세타 백작 부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크로세타의 재산 일부는 세리나 몫이 되는 거였다. 세르미온 남작 가로서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세리나는 그런 가족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에르긴이 미렐린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이 일간지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런 놈하고 결혼한다고 기뻐하는 것이다.
세리나는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도 세리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얻을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이 부모고 형제자매였다.
세리나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기쁘세요?”
“그럼! 네가 어엿한 백작 부인이 되었잖니.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미엘린처럼 책임감 없는 이와 오래 알고 지내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세리나가 떨리는 눈으로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선 룸에 모여 앉아서 이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한다고 떠들어 대고 있는 동생도 보았다.
‘정말 저 아이가 아픈 게 맞는 건가.’
‘가진 돈이 없어 먹을 것도 부족한 게 맞는가.’
세리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우지 못하겠다. 세리나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