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렇게 기쁜 날 너는 왜 울고 그러니? 네가 맞은 것도 아니지 않니. 미엘린이 맞을 짓을 했으니까 그런 일을 당한 거 아니겠어?”
“네가 출세하게 되니 실감이 안 나나 보구나. 너는 크로세타 백작과 이혼도 할 수 없단다. 그분이 너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도 못하지! 무려 왕께서 명하신 혼사니 말이다.”
세리나가 뜨거운 침을 삼켰다.
“제 인생은요?”
“왜? 에르긴 백작님을 선택한 건 너 아니었니?”
세르미온 남작 부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물었다.
“미엘린을 두고 그 남잘 고른 건 너였잖아, 세리나. 그래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거고. 네가 자초한 일을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이게 네 인생이야.”
세리나가 숨마저 들이켰다. 세르미온 남작 부인의 말이 전부 옳았다. 이 삶을 선택한 건 다름 아닌 세리나 자신이었다.
“우리는 네가 선택한 삶을 응원해 주는 것뿐이란다. 너의 가족으로서 말이야.”
세르미온 남작이 미소 지었다.
“결혼식은 언제가 좋겠니? 지금은 에르긴 백작께서 정신이 없으실 테니 미루는 게 좋겠지? 하지만, 너는 지금이라도 당장 백작 저로 가는 편이 좋겠구나. 왕명이 있으니 그분도 너를 쫓아내진 못할 게야.”
그게 중요한 건가?
“네가 안주인이니 금고 관리를 하게 될 거야. 원래도 미엘린이 관리하지 않았니? 그게 이제 네 몫이 되는 거다.”
정말로 그게 중요한 게 맞나?
세리나의 속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지는 듯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후려치는 듯한 격통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어머니…….”
“당장 짐을 챙기렴. 지금 당장이라도 가야지. 백작 저에 주인이 없을 테니 집사장 혼자 얼마나 힘들겠니. 너라도 가서 도와야지.”
그곳의 사용인들은 세리나를 인간 취급조차 않는다. 세리나는 그저 에르긴의 장난감으로서 존재했을 뿐이었다. 세리나가 그 저택에서 그나마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때는 미엘린의 초대를 받았을 때뿐이었다.
“어머니, 제발…….”
세리나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여기의 누구도 세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질 않았다. 그저 눈앞에 떨어진 기회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이게 바로 미엘린이 내리는 벌인 걸까?
“얼른 일어나렴, 세리나. 어차피 거기에 가면 미엘린이 두고 간 것들이 있을 거다. 그 애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며. 그걸 쓰면 되지 않겠니? 드레스나, 장신구. 전부 말이다. 사이즈야 수선하면 되는 거지. 네가 미엘린보다 사이즈가 조금 더 크니……. 의상실 마담부터 불러야겠구나. 그중 몇 벌은 내가 가져와도 될 거야.”
“그래요, 어머니. 어차피 너무 많아서 누이 혼자 입지도 못할 거예요. 그렇지, 세리나?”
세리나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창백한 볼을 타고 눈물이 무게를 가지고 떨어져 내렸다.
“왜 그렇게 우니. 행복한 새신부가 되어야 하는데. 하긴. 결혼식이 중요하지 않으니 행복한 새신부 타령은 안 해도 되겠구나.”
기실 세르미온 남작 부인의 눈에 세리나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리나가 백작 부인이 될 거라는 사실만 중요했다.
“그렇게 되면 네 동생도 좋은 신부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에르긴 백작은 사업 수완이 좋지 않니. 분명 가문은 더 번창할 거야.”
“미엘린이 위자료를 크게 받았다던데. 그게 타격이 있진 않을까요?”
“사업을 통해서 회복하면 돼. 이미 자리 잡은 사업체가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일 거야.”
“다행이네요.”
“얼른 회복해야 우리도 편안해질 텐데.”
가족들의 대화가 세리나 앞에서 맴돌았다. 더 불행한 것은 세리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모든 걸 잃은 세리나에게는 그들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세리나가 허망하게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내고는 읊조리듯 말했다.
“……백작 저로 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에르긴이 자리를 비웠으니 저라도 가서 있어야죠. 저는 이제부터 백작 부인인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세리나의 가족들은 그것을 청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잘 생각했다, 세리나. 원래 온 기회는 놓치는 게 아니야. 그것만큼 멍청한 일이 어디 있겠니.”
세리나가 기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느껴졌다. 남작 부인에게 등을 떠밀린 세리나가 짐을 챙겨서 남작 저택을 나선 것은 늦은 밤의 일이었다.
크로세타 백작 가 집사장은 세리나를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이 아무리 세리나를 경멸하더라도 이제부터 크로세타 백작 부인은 그녀였으니 말이다.
세리나에게 이건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었다.
* * *
그래도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욱신거리는 곳들이 있긴 했지만,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바르니 고통도 가라앉았다. 진정 효과가 있는 향초를 잔뜩 피운 덕에 악몽도 없이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개운해진 정신으로 튀어나오는 건 에르긴을 향한 욕설뿐이었다. 대체 인간이 어쩜 그렇게까지 엉망일 수 있는 건지. 현대 사회였으면 제대로 콩밥 먹여 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곳 법에 따르면 곧 풀려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번 사건은 내게 분노와 함께 결심을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한 일은 아이반에게 편지를 보내는 거였다. 오늘 점심을 같이 먹자는 내용이었는데 어제 하지 못한 것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내 외출을 응원했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굳건하게 돌아다니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게 좋다나. 얼굴에 든 멍을 가리기 위해서 옷깃이 높게 올라오는 드레스를 입었다.
손목엔 두꺼운 천을 둘러야 했다.
정말, 이게 무슨 꼴인지.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반이 도착했다. 아이반은 제대로 자지 못한 듯 거뭇한 얼굴이었다.
“아이반.”
“미엘린. 몸은 괜찮나요?”
“저는 괜찮은데…… 아이반이 더 아파 보이는걸요. 어제 잠을 못 잔 건가요?”
“아.”
아이반이 까칠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예. 잠을 자지 못했을 뿐이니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걱정을 받아야 하는 쪽은 미엘린 아닌가요? 어제 그런 일을 겪었는데요.”
“다행이군요. 아,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어제 아이반이 가져다준 쿠키도 먹었고 잠도 잘 잤거든요. 아침에 의사의 진료도 받았어요.”
느릿하게 대답하니 아이반이 미소 지었다.
“쿠키는 괜찮았습니까?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서 디저트 가게에 파는 걸 전부 구입했는데…….”
“전부 다 맛있었어요. 물론, 아직 다 먹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먹은 것만 해도 맛있었어요. 나머지도 당연히 맛있을 거로 생각해요. 아이반, 정말로 고마워요.”
어제 크리스티나와 그 쿠키가 있어서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달달한 것들로 배를 채우고 나니 잠시라도 에르긴에 대해서 잊을 수 있었다.
“고맙다고 했습니까?”
아이반이 실소를 흘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난데없는 아이반의 반응에 의아할 새도 없이 그가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네?”
대체 아이반이 내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는 거지? 지금 이 자리도 여러 가지로 고마운 아이반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미안하다니?
난데없는 사과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제가 미엘린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분명 에르긴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흐지부지되었지요.”
그게…… 미안하다고?
아이반은 이미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아이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반…….”
정작 내게 사과해야 할 놈은 저 잘났다고 그러고 있는데 아이반이 사과를 하다니. 그는 잘못한 게 조금도 없었다.
“다음엔 꼭 이런 일 없도록 지킬 겁니다.”
아이반이 맹세하듯이 말했다.
“다시는 미엘린이 그런 고초를 겪지 않도록 말입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또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 한 탓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이 소설에 들어와서 잘한 짓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크리스티나와 화해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반을 빼앗아 온 것.
그렇게 두 가지였다.
나는 인생 최고의 선택을 했다.
아이반과 먹는 음식은 눈물 맛이었다.
온갖 산해진미를 가져다 놓아도 그만큼 감동적이고 맛있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