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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8화 (28/92)

28화

몸에 멍이 가시는 데는 의사가 이야기한 대로 딱 2주가 걸렸다. 아무래도 멍에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아이반과의 약속은 2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딱 2주 후.

에르긴이 감옥에서 출소했다. 그사이에 세리나는 크로세타 백작 저에 들어가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참 뻔뻔도 하지.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한테 미안하다고 떠들어 대도 눈앞의 이익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결과라 그런지 실망할 것도 없었다. 아니, 더 이상 세리나에게 실망할 거리가 있긴 했나.

그 여자가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을 쓴 채로 에르긴의 출소를 기다렸다. 2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고 한들 그자가 정신을 차렸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에르긴은 패소하여 나랑 이혼한 것보다 왕이 세리나와 결혼을 명한 데 더 분노했을 터였다. 에르긴에게 또 다른 기회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돈 많은 졸부라도 유혹해서 결혼할 생각이지 않았을까?

눈부신 햇살이 챙이 좁은 모자 아래로 짓쳐 들었다. 눈을 깜빡여도 햇빛은 물러가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크리스티나는 세리나도 오지 않으려는 그 자리에 네가 왜 가야 하느냐고 투덜거렸지만 내게는 이유가 있었다. 에르긴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내 눈앞에서 봐야 했거든.

대신 크리스티나가 시킨 대로 호위를 대동했다. 인체스터 기사들이 내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에르긴 따위가 달려들면 목을 꺾어 버릴 정도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상처는 나았지만 에르긴에게는 절대로 낫지 않을 패배감을 안겨 줄 차례였다.

2주 동안 가만히 저택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분노한 클로린과 웨스턴, 두 사람과 함께 내가 이야기했던 호텔 사업을 구체화한 것이다.

색다른 재미를 줄 수만 있다면 무료한 귀족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는 데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호텔만 할 것이 아니라 살롱도 같이 결합해서 호캉스와 비슷하게 꾸민다면 승산이 있었다.

좀 더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말이다.

마사지와 음식, 그리고 오락거리로 가득 채울 생각이었다. 수영장을 비롯한 이 세계식 카지노까지 말이다. 이 세계의 빈티지한 로코코에 현대식을 가미하면 좋아할 듯했다.

라스타나 가문의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 경영인을 초대해 자문했다. 구체적인 사업안이 정리된 것이다.

“……미엘린?”

드디어 나왔군.

내가 마중이라도 나왔다고 생각한 건지 에르긴이 밝아진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역시…… 미엘린. 내 마음을 안 거지? 내가 전에는 미안해. 많이 다쳤나?”

내게 또 손을 뻗어 오는 에르긴 앞을 두 기사가 막아섰다.

“더 이상 접근하시면 공격하신다는 의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내 아내랑 대화 좀 나누겠다는데!”

에르긴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감옥에서 조금 생각이라는 걸 했으면 했는데 그냥 빈 머리 그대로 나온 모양이다.

“줄 게 있어서 왔을 뿐이에요.”

기사들에게 사업안을 내밀었다. 그것은 에르긴에게로 전달되었다.

“이게 뭐야? 사업안……?”

에르긴이 종이를 팔락이는 소리가 도로 위에 흩어졌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에르긴이 사업안을 전부 살펴볼 때까지 기다렸다.

“이, 이게 무슨…….”

“내가 앞으로 할 사업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려고 왔어요.”

기사들이 에르긴의 손에서 다시 사업안을 빼앗았다.

“미엘린!”

“눈치챘겠지만, 맞아요. 크로세타 백작님의 사업을 모방한 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읽어 봐서 알겠지만, 크로세타 백작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살롱에 비해서 훨씬 더 낫죠. 아, 물론 이걸 보여 줬다고 해서 크로세타 백작님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돈이 있어야 하지.”

차갑게 비꼬듯이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에르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걸 알려 주는 건 그냥 당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러니 최대한 발버둥을 쳤으면 좋겠어요.”

“미엘린, 당신 정말……!”

“오늘 이후로 우리가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아, 그리고 내가 전에 쓰던 것들 좀 버려 줄래요? 당신 새 부인이 그걸 걸치고 다니는 걸 목격한 이들이 좀 있어서. 구질구질해서 정말. 아니지. 세리나는 원래 내가 버린 걸 잘 주워 먹으니까.”

에르긴의 눈을 직시한 채로 말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에르긴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심이라고…….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내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그러는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했는데요? 내 결혼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인제 와서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니…….”

고개를 내젓고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하니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겠어요. 이만 가죠. 할 이야기는 끝났어요. 레퍼토리가 식상하니 재미도 없네.”

아픈 말만 쏙쏙 골라서 하고는 에르긴을 남겨 두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에르긴은 혼자 도로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실소를 흘리곤 고개를 돌렸다.

조금 속이 시원한 듯도 했다.

성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느껴 보라지. 가정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던 나처럼 말이다. 그게 내 복수였다.

* * *

헨리 왕은 약속을 지켰다.

헨리 왕의 이름으로 나와 아이반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에르긴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화사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내 녹안에 알맞은 청록빛 드레스를 입고 연노란색 모자를 썼다.

멍이 가셨기 때문에 답답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반은 우리가 평소에 자주 만나던 레스토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 왕이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라고 명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를 한 바퀴 돈 이후였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선을 받아야 했던 이유겠지.

“세상에. 정말로 크로세타 백작 부인이 나타났어요!”

“이젠 백작 부인이 아니지.”

“그러면 뭐라고 칭해야 하죠? 라스타나 부인?”

“그런가? 왕께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게 진짜인가 보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전부 들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와 아이반을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법정에서 에르긴은 제 무덤을 판 것과 다름없었다.

내게 폭력을 행사해서 이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 에르긴과 이혼한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거리낄 게 없었다.

“아이반 공작이라니. 미엘린 부인은 정말 복도 많네요.”

“그래도 틸리언즈에는 이미 정해진 후계자가 있잖아요. 서로 흠이 있으니 적당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지요.”

“미래는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남 일에 관심 많은 이들을 지나 아이반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에 도착했다. 아이반이 나를 위해서 의자를 빼내 주었다.

“미엘린. 오늘 잘 다녀왔습니까?”

“네.”

아이반이 표정을 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자가 또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습니까?”

“그자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기사들을 대동하고 갔는걸요. 제 근처에 오지도 못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아이반이 진중하게 말했다.

“오늘이 지나고 다음에 만날 땐 데이지도 함께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다리던 말이었다. 내가 먼저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아이에 대해서는 다른 것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부분인데 내가 실수로 말을 잘못해서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데이지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던가요? 만약, 아직 아이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데이지가 그러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만, 지금 아이는 많이 심약한 상태예요. 형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예민할 수 있어요.”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데이지로 인해 미엘린이 상처를 받진 않을지…….”

“전 괜찮아요!”

손을 내저었다. 앗. 너무 목소리가 컸나.

“큼. 정말로 데이지가 괜찮다면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저로 인해서 데이지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인걸요.”

“미엘린…….”

“잘 지내고 싶어요.”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품에 안아 보지 못한 아이였다.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김태진의 운명을 알았던 것인지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때는 그 또한 애가 타는 일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아이와 나를 위해서도 다행이었다. 데이지와의 만남은 내게는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데이지가 좋아하는 게 있을까요? 인형이라거나…….”

“저도 잘 모릅니다.”

아이반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저도 이제야 데이지와 친해지는 중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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