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9화 (29/92)

29화

“그러면 함께 알아 가면 되겠네요. 데이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 드레스를 선호하는지. 그런 건 알아 가면 될 거예요. 그렇죠?”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잘 되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이반이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이반은 삽시간에 6살 난 딸 아이의 부모가 된 셈이다. 아이반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반은 잘하고 있을 거예요.”

이건 진심이다. 데이지는 훗날 공작 가를 물려받을 만큼 컸을 때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제 삼촌을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항상 아이반에게 의지했다.

아이반의 방법이 잘못됐다면 데이지가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데이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밝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이반의 보살핌 덕분이리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데이지도. 분명 제가 살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아이반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직 제가 가문을 관리하는 법도 잘 몰라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는 사용인들이 데이지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한 탓에 아이가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좀 더 세심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요.”

“아이반…….”

“만약 그렇게 제가 실수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꼭 말해 줘야 합니다. 말해 주지 않으면 제가 바보 같아서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약속할게요.”

아이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관문을 넘어 이제 마지막 문을 남겨 두고 있었다. 데이지만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이 결혼은 무사하게 진행될 거였다. 크리스티나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 봐야겠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지.

우리가 그 나이 때는 뭘 좋아했더라?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도 나질 않는다.

* * *

에르긴이 허옇게 마른 입술을 문질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크로세타 백작 저로 돌아온 참이었다. 집사장이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백작님!”

“그간 잘 지냈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최악은 아니었지.”

에르긴이 쓰게 웃었다. 에르긴도 미엘린에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말 순간적인 감정이었다. 그간 자신이 꿈꿔 왔던 미래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생각에 주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에르긴이 참담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더 이상 미엘린은 에르긴에게 가까이 다가오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르긴을 더러운 벌레 보듯 경멸하는 눈치였다. 어떡하면 미엘린의 마음을 풀 수 있을지 가늠도 가질 않는다.

‘어디서부터 엉망이 된 거지?’

에르긴이 입술을 질근질근 물었다.

“……미엘린에게 연락 온 것은 없었나?”

“백작 부인께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군.”

괜한 기대였다. 사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미엘린이 그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절대로 돌아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빌어먹을.”

에르긴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에르긴의 옆을 집사장이 쫓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고해바쳤다.

“왕께서 공문을 내려보내셨고 그것을 빌미 삼아 세리나 영애께서 저택으로 오셨습니다.”

“뭐?”

에르긴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간 감옥에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에르긴과는 달리 미엘린은 그런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에르긴은 그것도 모르고 미엘린에게 매달렸다.

어쩐지 미엘린이 왜 별안간 자기 물건들을 처분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염치도 없이 그 물건들을 쓰고 있는 세리나 때문이었다.

얼마나 그 눈에 이상하게 보였을까.

미엘린은 라스타나 자작이 곱고 귀하게 키운 여자였다. 세상의 풍파는 조금도 모르고 자란 이가 바로 미엘린이었다. 그런 미엘린에게 에르긴은…….

“정말 등신 같군.”

욕설을 내뱉은 에르긴이 집사장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디 머물고 있지?”

“……백작 부인의 방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미엘린이 두고 간 물건들은?”

“전부 자기 것인 듯 이용하고 계십니다. 일부는 처분하시어 세르미온 남작가로 보내신 걸로 압니다.”

“정신이 나가 버렸군.”

얼마나 이 가문을 우습게 만들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에르긴이 거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먼저 세리나를 찾아내기 전에 그녀가 빨랐다.

“에르긴, 고생 많았어요.”

무덤덤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세리나가 인형처럼 중얼거렸다.

“세리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다들 바라는 대로 행동한 거죠. 왕께서 명하셨고 제 가족이 모두 바라는 대로.”

“세리나! 그 물건이 네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왜 어때서요. 미엘린이 버리고 간 건데. 저나, 에르긴이나. 그 물건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버림받은 것끼리 어울리면 되지.”

“세리나!”

에르긴이 고함을 내질렀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이런 무의미한 설전을 이어 가야 한다는 게 힘겨웠다.

“이런 일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미엘린의 물건을 되돌려 놓도록 해.”

“그런다고 미엘린은 안 돌아와요. 어차피 우습게 된 거, 더 우스워진들 무슨 상관이겠어요.”

세리나가 읊조리듯 말하고는 에르긴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세리나의 외면에 에르긴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지금 어딜……!”

“더 이상 대화할 이유가 있나요.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고 있는데. 아, 호적 정리는 언제 하죠? 왕께서는 한 달의 유예밖에 안 주셨어요. 얼른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아, 몰랐구나. 감옥에 갔다 왔으니 그럴 만도 하죠. 왕께서 한 달 안에 우리 관계를 정리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왕께서 권유하신 대로 건강 검진도 받았죠. 다행히 임신은 아니라네요.”

“세리나! 애초에 임신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됐어!”

“왜요?”

세리나가 비릿하게 웃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에르긴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차갑게 말라 있었다.

“나한테 약을 먹여서요?”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있어요? 그 난리를 쳐도 아이가 생기질 않는데. 당신이 자기 몸에 안 좋은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저한테 했겠죠.”

“당연한 일이었어.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기면 곤란한 건 둘 다 마찬가지니 말이야.”

“그렇겠죠. 상대방 동의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땐 그런 명분이라도 있어야죠.”

세리나가 한 번도 에르긴에게 보인 적 없던 태도였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오만한 태도였다. 아니……, 그보다는 다 포기한 것 같은 초연함이라고나 할까?

에르긴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 식으로 굴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왜요? 나도 때리려고요? 그래요, 때려요. 나는 미엘린과 달라서 지켜 줄 사람도 없거든요.”

세리나가 표독스럽게 에르긴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조금도 겁나는 게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당시이야말로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요. 우리는 이제 죽으나 사나 부부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싫으면 당신도 나를 존중해 줬으면 좋겠군요.”

세리나가 자기가 할 말을 따박따박 늘어놓고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에르긴과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에르긴이 허탈한 눈으로 세리나를 보았다.

위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에르긴은 모든 걸 잃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명예도 돈도, 그리고 미엘린도. 미엘린을 잃음과 동시에 그가 가지고 있던 전부를 잃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세리나와 세르미온 식구들이다.

전부 에르긴에게 도움이 되긴커녕 해가 되는 사람들.

“빌어먹을!”

아무래도 내일은 헨리 왕을 찾아가서 이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해 봐야겠다. 헨리 왕에게 뇌물을 안겨 줘서라도 이 결혼을 물러야 할 것 같았다.

에르긴이 이를 부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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