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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0화 (30/92)

30화 @AW

사실 내가 사업을 구상하긴 했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내가 아닌 전문 경영인이었다. 그 또한, 내가 구상한 사업이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전문가도 있고 그를 돕는 회계사와 변호사도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넘치는 자본금도 있고.

사업은 순항을 하듯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어린 여자애가 좋아할 만한 거…… 인형? 과자? 분홍색 구두?”

크리스티나가 신빙성 있는 것들을 늘어놓았다.

“좀 더 눈에 띄는 거 없을까?”

“……인형의 집?”

“인형의 집?”

뭐, 한국에서 팔던 그런 분홍색 미미의 스위트 하우스 같은 느낌인 건가.

“작은 소품까지 일일이 만들어서 채워 넣는 거 있잖아. 아기자기한 거. 아이들이 보기에도 예뻐 보이고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거.”

“그런 게 유행이라고?”

“응. 평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건데 목수가 자기 딸에게 인형의 집을 만들어 줬대. 나중에 이런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면서. 그리고 그 집을 색칠하고 이불이나 그런 걸 만들어서 넣어 준 건 목수의 아내. 그걸 생일 선물로 받은 딸이 여기저기 자랑한 거지. 그래서 목수하고 아내가 그걸 만들어서 팔게 된 거고.”

음. 미니어처 같은 거구나.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 조카가.”

크리스티나가 한층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조카가 그 인형의 집을 사 달라고 두 달을 졸랐거든. 두 달 내내 그 말을 달고 살았어. 헤이즐은 버릇 나빠진다고 안 사 주려고 하고. 그래서 결국 오빠가 훈련에서 돌아와서 사 줬잖아.”

“그래서 그 조카는 만족했고?”

“물론. 그 인형의 집은 지금 조카 침대 옆에 놓여 있어. 절대 손도 못 대게 해.”

“가격대는?”

“그건 모르겠는데. 그게 일일이 수작업하는 거라서…… 첫 만남에 선물하기에는 부담되려나.”

그래도 가장 좋은 선물일 듯했다. 어린애들이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금액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나?

“외출해야겠다. 인형의 집 어디서 파는지는 알아?”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왕 줄 선물이라면 데이지가 가장 좋아할 만한 걸로 주고 싶었다. 데이지가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도록.

데이지는 어른도 견디기 힘든 부모의 부재를 어린 나이에 겪고 있다. 그 애가 잠시라도 선물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서 그 아픔을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부모님의 죽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김태진과의 이혼 소송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제대로 심신을 돌보지 못했다.

그날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떠오르는 듯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아득함.

그리고 배신감.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도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던 김태진과 오지연의 악랄함. 분노가 파드득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이곳엔 그들을 닮은 이들은 있어도 그들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독하게 단죄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과거의 분노와 고통이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괜히 씁쓸해졌다.

* * *

직접 인형의 집이라는 걸 보고 나니 그게 데이지에게 줄 선물로 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예약제로 물건을 만들기 때문에 지금 예약하면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운이 따라 주려는 것인지 내게 인형의 집을 판다는 귀부인이 있었다.

“정말로 제게 인형의 집을 파신다고요?”

“네. 저는 다시 예약하면 되니까요. 제 손주는 지금 영지에 있어서 3개월 후에나 볼 수 있답니다. 부인께서 새로운 인형의 집을 제 이름 앞으로 예약만 해 주신다면 지금 이 완성품은 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귀부인이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뭔가 여유가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예약을 걸어 드리면 될까요?”

“리엔스터입니다.”

그 말에 옆에 얌전히 있던 크리스티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잖아!”

크리스티나가 귀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습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 전에 법정에서 숄을 빌려주셨죠. 정말 감사했습니다.”

숄?

법정에 숄이면…….

아!

“그분이셨군요. 제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 숄을 돌려드리고 싶은데 혹 제가 나중에 찾아뵈어도 될까요?”

“별것도 아니었는걸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귀인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이름으로 인형의 집을 예약하고 공방에서 나왔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다는 백작 부인을 붙잡을 순 없었다.

“이게 무슨 우연이래.”

크리스티나가 웅얼거렸다.

“왜?”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귀족 중에서 처음으로 이혼한 사람이잖아. 그전에는 아무리 부당해도 이혼할 생각은 못 하고 참고만 살았는데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용기를 낸 거지.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거든. 꽤 힘든 소송이었던 걸로 기억해. 법으로는 명시되어 있지만, 명예 때문이라도 다들 모르는 척했잖아.”

개척자라는 거네.

저 사람이 없었다면 내 이혼도 그리 쉽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 말씀으로 아주 난리였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것도 신기한 인연이네. 숄은 리엔스터 백작 가로 보내 드리면 되겠다.”

“……선물도 같이 넣어서 보내 드리자.”

“좋은 생각이야.”

나와 크리스티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인연이 어디로 번질지 모르고 있었다.

* * *

나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데이지에게 줄 선물도 구했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색감으로 옷도 골라 입었고. 레스토랑 예약도 완료했다.

좋아. 넌 할 수 있어, 미엘린.

이 결혼은 아이반에게도 필요하지만 내게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에르긴이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일에 당하고만 있지만 어떻게 변모할지 모른다.

라스타나 자작 가의 신분은 에르긴의 신분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이다. 에르긴이 내게 마수를 뻗치기 전에 안전한 곳에 몸을 의탁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반의 사정도 급했고.

아이반에게는 이제 한 달 반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긴장된 마음에 레스토랑에는 30분이나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오늘 나의 무기이자 방패가 되어 줄 인형의 집을 가지고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데이지와 아이반이 얼른 왔으면 싶다가도 다시 시간을 미루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이반을 찾아가서 계약 결혼을 제안하던 날보다 지금 더 떨렸다.

레스토랑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나 고소한 음식 냄새 같은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물만 주야장천 마셨다. 이미 사교계에는 헨리 왕이 나와 아이반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그 소문에 박차를 더하게 될 거였다.

그리고 약속 시각이 되자마자 아이반과 데이지가 도착했다. 아이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게로 가까워지는 묵직한 발소리와 통통 튀는 가벼운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몸이 굳어서 고개가 돌아가질 않는다.

그렇게 뻣뻣하게 앞만 보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미엘린. 잘 지냈습니까?”

“네, 저는……. 아이반은요?”

아이반이 미소 짓고는 옆에 앉은 아이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지라고 합니다.”

왠지 모르게 데자뷔가 일었다. 어디선가 들어 봤던 목소리라고 했더니……. 연회장에서 마주쳤던 아이였다. 나의 비밀 친구. 데이지도 나를 알아본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 네가 데이지구나. 오랜만이야.”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잘 지냈니?”

“네. 이모는요?”

“나도 잘 지냈지.”

“두 사람 아는 사이입니까? 데이지, 만난 적이 있었니?”

“전에, 전에 연회장에서요……. 테라스에서 데이지랑 친구 해 준 이모.”

“아.”

아이반이 생각났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노아가 데이지와 함께 있던 귀부인이 있었다고 했었는데. 그게 미엘린이었군요.”

그때 데이지가 외숙부님이라고 불렀던 이가 노아라는 사람인가 보다.

“노아는 데이지의 외숙부 되는 사람입니다. 힐리아의 동생이지요. 지금은 공작 가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데이지가 꾸물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그…… 우리 비밀은…….”

“쉿.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지.”

아무래도 아이는 아이반에게 내가 자기 비밀 이야기를 했을까 봐 걱정되었나 보다. 데이지가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 아이반이 슬퍼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이반과 데이지를 천천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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