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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1화 (31/92)

31화

두 사람 모두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를 배려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 아이반은 그로 인해서 데이지가 감정을 다치는 걸 걱정하고 있었고 데이지는 그 반대였다.

아이반은 나와 데이지의 비밀이 궁금한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날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아이반은 데이지에 관해서 그렇게 걱정할 게 없었다.

데이지는 충분히 아이반을 좋아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만 살짝 흘려 줘야겠다.

의외의 인연에 놀람도 잠시 준비한 선물을 데이지에게 건넸다.

“이건 데이지에게 주는 선물이야. 데이지 한 번 열어 보겠니?”

“……고맙습니다.”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아이의 고사리손이 움직이는 것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아이반도 나도 숨을 죽인 채로 데이지의 반응만 기다렸다.

꽤 부피가 큰 선물이다 보니 포장지를 벗기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인형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와……!”

데이지가 탄성을 터뜨렸다. 일단, 이 정도면 반응은 괜찮은 것 같은데. 아이반과 내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뽈뽈거리며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눈이 일렁이면서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눈은 틸리언즈 가의 유전인지 보라색이었고 머리카락은 아이반과 다른 금발이었다. 곱슬거리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목덜미 위에서 경쾌하게 흔들거렸다.

“마음에 드니?”

“네!”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편하게 미엘린이라고 부르렴.”

“네, 미엘린!”

다행히 데이지와의 첫 단추는 잘 끼운 것 같았다. 데이지는 선물에 만족했고 덕분에 식사 시간은 내내 부드러웠다. 나의 작고 소중한 비밀 친구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는 반쯤 잠에 잠겨 있었다.

“졸리니?”

“으응……, 아니에요.”

눈을 비비고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데이지를 아이반이 안아서 먼저 마차에 태웠다. 담요를 덮어 주니 아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미엘린. 아돌프가 죽은 이후로 데이지가 오늘처럼 행복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어요. 제가 부족했다는 증거겠지요.”

“저도 크리스티나에게 힌트를 얻은걸요. 크리스티나에게 조카가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데이지가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얼른 돌아가 봐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탔다. 다시 나를 한 번 돌아보는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데이지와의 일 덕분에 아이반에게도 점수를 얻은 것이다.

아이반과 데이지를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잠든 데이지 때문에 다른 마차를 타고 돌아가겠다고 하고 아이반을 먼저 보낸 것이다.

“후우.”

또 한고비를 이렇게 넘겼다.

그때 만났던 아이가 데이지라니. 이런 우연이 어디 있나 싶었다. 돌아갈 생각으로 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미엘린.”

“……크로세타 백작님.”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나를 쫓아왔던 인체스터의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내 앞을 막아섰다.

“이젠 제가 가는 곳은 다 쫓아다니실 예정이신가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게 스토커지, 뭐야. 혀를 차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에 있다고 그래서……. 한 번 만나고 싶었어.”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사람이 까칠해 보였다.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을까?”

어차피 어딜 가든 쫓아올 거 같고.

“여기서 얘기해요. 할 말이 뭔데요?”

긴 시간을 내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미엘린. 곧 우리 부모님이 돌아오실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에르긴의 부모님이 곧 돌아올 예정이기는 했다. 그들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5개월 전의 일이었다. 전부 내 돈으로. 어머니 생일 때 보내 드렸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요?”

“……부모님은 아직 우리가 이렇게 된 거 모르셔. 어머니와 아버지가 미엘린을 좋아하셨잖아.”

“하.”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내 돈을 좋아한 거였지. 마치 내 돈을 자신의 것처럼 물 쓰듯이 쓰고 돌아다니곤 했다.

그럼에도 과거의 미엘린은 에르긴을 생각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크로세타 영지에서 지내는 그들이 수도로 올라오기만 하면 평소에 미엘린이 소비하는 금액의 수 배는 소모하곤 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능력이 좋으면 이런 걸 다 해 보겠어요. 전에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이오. 에르긴의 사업이 잘되어 가는 모양이군.’

‘미엘린, 너도 복 받은 줄 알렴. 에르긴이 아니었으면 이런 건 꿈도 못 꿨을 거야.’

실로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달고 살았다.

대체 에르긴이 어디가 잘나고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엘린이 그들을 참아 넘겼던 것은 전부 에르긴 때문이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 놓고 자기 부모님이 나를 아껴 줬다니. 정말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다.

“식사 한 번 같이 해 줄 수 없을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요.”

“미, 미엘린.”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제 부모님인가요?”

“그래도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선 순서가…….”

“하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럴 생각 없어요. 크로세타 백작님과 제 사이가 정리되었으니 나머지는 백작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왜 말을 못 알아듣는 거지?

“그래도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말이 안 통하네.”

짜증이 확 솟았다.

저 속내가 빤히 보였다. 부모님을 앞세워서 나를 설득해 보겠다는 거다. 미엘린은 평소에 부모님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어쩌나.

그렇게 순해 빠진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데.

마침 내가 타고 가야 할 마차가 들어왔다.

“이만 가 볼게요. 방금 들은 이야기는 없던 걸로. 아. 그 식사, 세리나랑 하면 되겠네요.”

“미엘린!”

나를 잡으려는 에르긴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이야기만 하겠다는 거잖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으, 지겨운 레퍼토리. 뭘 그렇게 자기가 누군 줄 아냐고 하는지. 왜 저런 사람들은 꼭 저런 대사를 빼놓지 않는 걸까?

혀를 내두르곤 마차에 타서 문을 닫았다. 바깥과 소리가 차단되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데이지, 아이반과 시간을 보내고 기분이 좋았는데 에르긴 탓에 불쾌해졌다.

크로세타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르긴을 어떤 형태로든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모든 게 잘 풀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르긴을 마주칠 때마다 도로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진상을 만나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았다. 자꾸만 멀쩡한 내 일상을 망가뜨리려고 드는 에르긴이 경멸스럽다.

정말 민폐라니까.

“아. 열 받네. 내가 제 부모님을 왜 만나.”

정신 좀 차리라고 머리에 총이라도 쏴 주고 싶었다.

후우.

* * *

에르긴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미엘린이 이 레스토랑에서 아이반과 식사를 하고 있다는 걸 전해 듣자마자 발 빠르게 달려왔다. 부모님이 일정보다 빠르게 돌아오기로 하신 것은 미엘린과 에르긴 때문이었다.

이게 에르긴이 생각해 낸 한 수였다.

저택에서 세리나가 제 발로 걸어 나가고 미엘린을 돌려놓을 한 수. 미엘린은 부모님께 항상 약했다. 그러니 부모님이 나서서 미엘린을 설득하고 보듬어 주면 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미엘린이 에르긴을 용서한다는데 왕이 어쩌겠는가. 미엘린과 함께 왕 앞에 가서 간청한다면 왕은 들어줄 것이다.

“안 만나 주면 못 찾아가는 게 아니지, 미엘린. 우리는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이제야…… 에르긴의 심장이 뛰는데 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엘린은 고상한 공주님 같았다. 에르긴이 뭘 해도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왕궁에 사는 공주님.

에르긴보다 가진 것도 많았고 에르긴보다 인맥도 넓었다. 그런 미엘린에게 에르긴은 비참하지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나 지금 미엘린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못된 말을 하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웃기만 하던 미엘린과는 달랐다. 에르긴은 왕궁의 고고한 공주님이었던 과거보다 지금의 미엘린에게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오늘 한 번 더 느꼈고 말이다.

‘절대로 못 놓쳐.’

만약 결국 놓치게 된다면.

차라리 망가뜨리는 게 나으리라.

에르긴이 상반된 마음을 동시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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