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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2화 (32/92)

32화

아이반이 잠든 데이지를 침실에 눕히고 나왔다. 데이지가 저녁 내내 붙들고 놓지 않았던 인형의 집은 침실 머리맡에 놓였다.

그리고 아이반은 요즘 들어 미엘린에 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미엘린이 떠오른다. 당차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던 미엘린. 에르긴에게 몹쓸 짓을 당해 무너지던 미엘린. 누구보다 여려 보이던 미엘린.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서 아이반에게 미소를 건네던 미엘린. 오늘 데이지에게 상냥하게 미소 짓던 미엘린.

그 모든 것이 미엘린의 모습이었다.

아이반은 매 순간 미엘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반의 인생에 별안간 날벼락처럼 찾아든 미엘린이 그의 일생에 스며든 것이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미엘린은 아이반이 위태로운 순간에 그에게 나타났다.

그게 헨리가 말한 대로 계획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미엘린이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아이반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또한 간절할 때 미엘린이 필요했던 것이니. 둘이 같지 않은가. 그로 인한 동질감으로 미엘린에게 더욱 마음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미엘린은 아돌프를 잃어 공허하고 텅 비어 버렸던 아이반의 일상을 뒤바꿔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미엘린의 반짝임이 아이반을 끌어들였다.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미엘린의 강인함이 그를 매혹했다.

미엘린이 걱정되고 그녀의 불행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고. 아직은 그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미엘린은 어떨지 모르겠다.

미엘린은 지금 상황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에르긴은 끈질기게 미엘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미엘린은 에르긴에게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 미엘린에게 감정까지 강요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괜찮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미엘린은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이반과 미엘린에게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

헨리가 하는 말이 아무리 감정이 없던 이들도 살…… 맞대고 살다 보면 감정이 생긴다고 했다.

‘결혼이라…….’

아이반은 정말로 실감이 났다.

자신이 단순한 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건 결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사교계에 로맨틱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야수 같은 전남편으로부터 탈출한 불쌍한 아내와 백마 탄 왕자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도 미엘린과 아이반을 비난하지 않았다. 법정 앞에서 있었던 사건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헨리 왕이 직접 주선한 만남이라는데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정말 전하께서 이 만남을 주선하셨습니까? 일각에서는 공작이 아깝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전하.’

‘둘 다 아픔이 있지. 나는 미엘린 부인을 아주 좋게 보고 있네. 그 사람이라면 아이반을 도와 공작 가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야. 데이지도 미엘린 부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던데.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말게.’

누군가의 질문을 왕은 단호하게 잘라 냈다. 더 이상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아이반과 미엘린은 공식적인 연인이 된 것이다.

그 소식은 가이스에게도 전해졌다.

“이렇게 수를 쓴다고?”

가이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신문지를 쥐고 분노하는 가이스를 그의 아내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뭘 그런 눈으로 봐!”

“그럴 시간에 나가서 돈이나 벌어오는 게 어때? 먹을 빵도 떨어졌는데.”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이 아내가 코웃음을 쳤다.

“내게는 틸리언즈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지.”

가이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반과 미엘린이 결혼을 하더라도 무효로 돌릴 방법이 있었다. 아이반과 미엘린이 결혼 후 3개월 안에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낸다면 두 사람의 결혼은 무효로 돌아간다.

대귀족에게만 적용되는 고리타분한 법이 가이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정략결혼으로 얽힌 이들이 밤을 보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면 증거를 만들어 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도 아니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불륜을 일으킨다면? 이왕이면 미엘린 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좋았다. 왕이 두 사람을 직접 찢어 놓을 테니 말이다. 그 이후로 3개월 이내에 결혼하지 못한다면 아이반은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대단한 공작이 또다시 적합한 결혼 상대를 만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후자가 더 낫겠는데?’

하지만, 가진 것 없는 가이스 혼자 일을 꾸미는 건 불가능했다. 돈이 있어야 이런 음모도 가능하니 말이다. 가이스는 이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를 한 명, 알 것 같았다.

“대체 뭘 하려는…… 가이스!”

“돈 벌어오라며. 다녀올게.”

가이스가 저속하게 낄낄거리며 집을 나섰다. 일단 아이반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가이스 또한 틸리언즈의 핏줄이니 본가의 부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두 번째 수를 실행으로 옮기면 된다.

* * *

데이지와의 만남 이후로는 모든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데이지의 허락하에 가장 먼저 결혼 날짜가 잡혔다. 모든 허례허식을 생략하고 이 주일 후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이 주가 밀린 이유는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였다.

헨리 왕이 직접 신전에 명령을 내려 최대한 빨리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대사제가 시간이 비는 날이 이 주일 후 토요일뿐이었다.

나는 사실 굳이 결혼식 드레스를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 주라는 유예를 얻게 된 것이다. 나보다 더 설렌 것은…….

“어머! 어머! 이 드레스 좀 봐. 얘, 너는 결혼할 생각 없니?”

“저는 검과 결혼했어요, 어머니. 미엘린이나 예쁘게 입혀서 결혼시키시면 되지요.”

“얘 좀 봐라. 미엘린, 얘가 이렇게 무뚝뚝하다.”

훈련지에서 돌아온 인체스터 백작 부인이었다. 백작 부인은 소녀처럼 볼을 붉히고는 열정적으로 드레스를 골랐다.

“네게는 이 드레스도 잘 어울리겠구나. 이 주일 안에 가봉이 되는 게 확실한가?”

“예, 백작 부인. 제 의상실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다행이군. 그러면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과 이것도 입어 보도록 하지. 결혼식 드레스를 한 벌밖에 고르지 못한다는 게 정말 유감이야.”

절대 유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미 다섯 벌을 입어 보았다. 앞으로 더 입어 봐야 한다는 것도 기가 빨리는데 결혼식 드레스가 여러 벌이라니. 입장할 때 한 벌, 그리고 나갈 때 한 벌인 건가.

사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도 한정되어 있었다. 인체스터 가문과 헨리 왕과 왕비. 그리고 아이반의 보좌관들과 마지막으로 데이지.

끽해야 열 정도 될 사람들 앞에서 드레스를 두 벌이나 바꿔 입으라니!

하하. 욕심도 많으셔.

“아무래도 크리스티나가 결혼식 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을 듯하니 네가 두 벌 입는 건 어떠니?”

“어머. 이미 두 벌째잖아요, 부인.”

누구냐.

맞는 말이기는 한데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크리스티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부채를 팔랑이며 도도하게 허리를 세우고 의상실에 들어온 것은…….

“세리나?”

“이젠 백작 부인이야, 크리스티나. 말조심해 줄래?”

세리나가 생긋 웃었다. 세리나는 일전과는 다른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옷들을 리폼해서 입는 것인지 익숙한 디자인인데 조금씩 달라졌다.

크리스티나가 세리나 앞을 막아섰다.

“그게 무슨 뜻이야?”

세리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까맣게 죽어 버린 눈동자와 붉게 칠한 입술이 대비된다. 마녀라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본디 세리나가 가지고 있던 처연한 분위기는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지고 없었다.

세리나가 피식 웃었다.

“무슨 뜻이긴. 두 번째 결혼을 하는 거 맞잖아? 이미 네가 입을 몫까지 입는 것 같은데.”

이런 걸 흑화했다고 하는 건가.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데.

크리스티나가 세리나에게 쏘아붙이려는 걸 막고 내가 나섰다.

“그러게. 벌써 두 번째네. 너는 이럴 능력도 없을 텐데, 그렇지?”

그래도 나란 존재가 세리나에게 타격을 주긴 했는지 내 말에 얼굴이 희게 질렸다. 드레스를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드레스도 내가 버린 거 주워 입은 거잖아. 안 그래?”

“……그래, 그랬지. 네가 얼마나 별로였으면 에르긴이 나를 만났겠어? 틸리언즈 공작도 그럴지 누가 알아?”

세리나가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렸다.

“아이반이 에르긴과 같은 수준인 줄 아니?”

세리나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세리나가 대체 왜 여길 왔나 했더니. 세리나의 뒤로 에르긴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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