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여기서 길 막고 서서 뭐 하는 거니? 드레스 좀 고르고 있으라니까! 정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앙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세리나를 밀치고 들어온 대부인이 나를 발견했다.
“어머, 미엘린. 여기서 보니 반갑구나.”
대부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세리나가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대부인.”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니.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이제 그럴 사이가 아니라서요.”
에르긴이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뭐, 말을 못 했니 어쩌니 하더니. 알게 되긴 했나 보지? 저 부부는 물 먹는 하마나 마찬가지라서 달마다 쓰는 돈이 어마무시했는데.
에르긴이 감당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아니라 즐거움이 앞섰다.
“미엘린. 안 그래도 널 찾아가려고 했다. 듣기로는 너와 에르긴 사이에 깊은 오해가 생긴 모양이더구나. 저 계집애가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았다지?”
며느리로 인정도 못 받는 건가?
저속한 단어로 지목당한 세리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진 게 보였다.
“에르긴과 너. 좋았잖니. 그래서 네가 잘못된 길을 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어.”
하아.
지금 몰상식한 건 대부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다. 그것도 전 시어머니. 에르긴에게 했던 것처럼 굴었다가는 이슈에 오르기 쉬웠다. 지금도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관심 깊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예의 있게 엿을 먹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대부인.”
나를 뒤에 숨긴 인체스터 백작 부인이 나섰다.
“어머, 백작 부인. 미엘린을 돌봐 주고 계신다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한 번 찾아뵈려고 했어요.”
“제가 검을 드는 기사라 돌려 말하는 걸 잘하지 못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미엘린과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불쾌합니다. 안 그러셨으면 좋겠군요.”
나를 막고 선 백작 부인의 뒷모습이 장벽보다도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이들이 잠시 싸웠다고는 하나 화해를 하도록 도와야지요. 결혼이 애들 장난인가요?”
“말 잘하셨네요. 결혼이 애들 장난인가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거로도 모자라 인제 와서 아쉬우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하게 용서하라고 요구하다니. 아들을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인체스터 백작 부인이 혀를 찼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그러는 백작 부인이야말로 미엘린이랑 무슨 사이라고……!”
여전히 높은 목소리였지만 이미 인체스터 백작 부인의 기백에 눌린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인체스터 백작 부인의 기세가 흉흉하기도 했고……. 아무리 같은 백작이라도 인체스터의 지위가 더 높았다.
인체스터는 지금도 왕의 인정을 받는 무가였고 크로세타는 이제야 다시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미엘린이랑 무슨 사이긴. 내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다시는 이 아이를 크로세타 백작과 엮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보게, 마담.”
“예, 백작 부인.”
“소란스러운데 계속 지켜보기만 할 건가? 이래서야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겠어?”
“나도 드레스를 사러 온 손님이에요!”
“그러면 얌전히 드레스나 보고 가세요, 대부인. 더 이상 남의 일에 상관 마시고.”
“백작 부인!”
대부인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인체스터 앞에서 더 이상 고개를 치켜들진 못했다.
“미엘린.”
“네?”
“너는 들어가서 이 드레스를 입어 보렴. 내가 이 자리는 정리하마.”
“그래. 그게 낫겠다. 마담. 가장 좋은 의상실이라고 평판이 대단하면 뭐 하나. 고객도 관리해야지.”
“네, 크리스티나 영애.”
크리스티나가 내 등을 탈의실로 떠밀었다. 그 손에 못 이긴 척 떠밀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탈의실 안은 단절된 공간처럼 안전하기만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를 지켜 주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찰랑거리며 고여 들었다. 점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대부인과 세리나는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탈의실 앞에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었다.
“풉.”
“왜 웃어?”
“그냥. 좋아서.”
“별것이 다 좋다.”
“이것도 정말 예쁘구나, 미엘린! 후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공작께서는 어떤 말씀도 없으셨니?”
“네. 아이반은 제가 원하는 걸로 골라도 된다고 그랬어요.”
“드레스는 신랑도 같이 와서 고르는 게 좋은데…….”
“바쁜걸요. 지금쯤 왕성에 불려가 있을 거예요.”
아이반은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사실 나는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말소된 상태지만 아이반은 아니었다. 아이반은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걸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아이반의 결혼식에 설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다름 아닌 헨리 왕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헨리 왕은 마치 아들을 결혼시키는 것처럼 굴었다.
아이반을 매일같이 불러들여서 결혼식에 대해서 상의하는 것이다. 세리나와 아이반이 결혼했을 때는 오히려 신전에 훼방까지 놓아서 난리였는데 말이다.
“왕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니?”
“아니요. 왕께서 신랑이 입을 예복을 직접 맞춰 주시겠다고 하셨답니다. 왕실 재단사에게요.”
크리스티나가 유난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헨리. 정말로 이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내가 보기엔 정말로 이래야만 해. 이 결혼이 네게는 유일한 추억이 될 테니 부족함은 없어야지. 네 결혼을 망치면 훗날 아돌프의 원망을 어떻게 들어 주나.”
헨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미엘린도 드레스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미엘린은 시간이 된다면 동행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지만, 헨리는 무슨 앙심인지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이 결혼을 찬성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을 보여 주듯 헨리 왕은 미엘린과 아이반의 결혼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해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을 훼방 놓는 것을 보아선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불만이 가득한 질문에 헨리 왕이 턱을 괴고 웃었다.
“물론, 자네의 결혼을 지지하네. 미엘린 부인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그래도 심술이 나는 걸 어쩌겠나.”
삐딱한 말에 아이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그렇게 어릴 때와 조금도 안 변했는지. 내가 자네 장난감인 줄 아나?”
“장난감은 아니어도 그에 필적하는 가장 좋은 친구인 건 맞지.”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방해할 건데?”
“오늘이 마지막이야. 안 그래도 왕비에게 한 소리 크게 들었거든. 이보게, 아이반.”
헨리 왕이 장난스럽던 기색을 지우고 진지한 낯빛을 했다. 이럴 때 보면 이 망나니 같은 인간이 왜 왕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이반이 헨리 왕을 나지막한 시선으로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자넨 아돌프에게 마음에 빚을 지고 있지.”
아이반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맞는 말이었다. 나이 차가 나는 아돌프는 아이반을 아들처럼 키웠다. 아돌프에게는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았는데 아이반도 그중 하나였다.
아돌프는 아이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지원했다. 그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반은 아돌프를 토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아이반은 원하던 대로 가문의 의무도 내려놓은 채로 기사도를 걸었다. 지금은 검은 손에서 내려놓았지만 과거에는 틸리언즈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검을 배웠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틸리언즈를 지탱하는 아돌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반이 그렇게 제멋대로 사는 동안 가문에 짓눌린 아돌프가 죽었던 것이다.
아돌프는 힐리아를 두고 제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고 칭했다. 힘든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아돌프가 처음으로 내보였던 씁쓸함이기도 했다. 힐리아가 있으면 이 답답한 공작 가에서도 숨을 내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힐리아가 죽고 아돌프가 죽던 순간에도 아이반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그 마음의 짐을 갚겠다고 데이지를 짊어지고 가겠다는 걸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을 생각이네.”
아이반이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