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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4화 (34/92)

34화

“내게도 아돌프 또한 혈족이라는 걸 자네는 종종 잊는 것 같더군. 다만, 나는 아돌프보다 자네를 더 걱정한 것뿐이야.”

“……알고 있네. 자네는 항상 나에게만큼은 관대했어.”

“좋은 친구라니까. 그런데 다만, 아이반. 그 짐에 억눌려서 자네의 삶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자네가 좋은 걸 해.”

“그게 무슨…….”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미엘린 부인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

“미엘린 부인이 그 아이에 대해서 새로운 욕심을 가지게 된다면 말일세. 아니라고는 부정하지 말게. 사람은 어떻게 변할지 몰라.”

헨리 왕의 말이 맞는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이를 가진 미엘린이 다른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반의 뇌리에 데이지와 함께 웃고 있던 미엘린이 떠올랐다.

깨끗한 미엘린의 눈동자에는 데이지를 향한 호의로 가득했다. 그 눈동자가 언젠가 악의로 변질된다면…….

“그때는 데이지를 내려놓아도 괜찮네.”

“헨리……, 나는…….”

“그 애로 인해서 자네의 행복을 내려놓지는 말게. 그게 나의 부탁이네.”

아이반이 이를 악물었다.

미엘린의 맑은 녹안이 이 순간 간절하게 떠올라 버렸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철나무의 녹음을 고스란히 품고 있던 에메랄드빛 눈동자였다.

헨리 왕의 말은 아이반에게 파문을 남겼다.

미엘린과 아이를, 그리고 아이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묵직하게 와닿았다.

아돌프가 죽은 이후로 다짐했다. 데이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삶의 이유가 생긴다면……. 지금 미엘린을 마음속에 들이게 된 것처럼 말이다.

데이지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렵군.”

“항상 인생은 어려운 법이야. 자네가 그걸 알게 됐다니 기쁘군.”

헨리 왕이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시종장이 서류 봉투를 하나 가지고 왔다.

“이게 무엇인가?”

“자네가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대신한 일이지.”

서류 봉투 속의 내용물을 확인한 아이반이 놀란 얼굴을 했다. 계약서라고 적혀 있는 서류 끝에는 헨리와 미엘린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미엘린 부인은 절대로 데이지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그러나 선택은 자네 몫이야. 그것으로 훗날 미엘린 부인의 요구를 억압할 수도 있고……. 혹은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도 있겠지.”

“헨리, 자네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어.”

아이반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없는 곳에 불려와 이런 계약서를 작성했을 미엘린의 마음이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럼에도 미엘린은 이것에 대해서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 또한 자네를 위한 일이었으니 용서하게. 그러니 말하고 있지 않나. 원한다면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언젠가를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해야 했어.”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지?”

“……나 또한 아돌프와 약속했거든.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를 지키겠다고. 자네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말이야. 그리고…… 빚을 갚는 중이야. 틸리언즈가 나를 이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한 희생을 잊지 않았거든.”

헨리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아이반도 알아차렸다. 아돌프가 아이반을 아들처럼 키워야 했던 것은 공작 부인이 이른 나이에 타계했던 탓이었다.

공작 부인은 헨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었다. 반역을 일으켰던 선대 왕의 동생, 카우렌 대공의 칼 앞에 뛰어들어 헨리를 지켜 낸 것이다. 헨리가 유독 아이반에게 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마음 쓰지 않아도 되네.”

“그럴 수야 있나. 자네는 그 덕에 어머니의 손길 한 번 받지 못하고 자랐는걸.”

헨리가 미소 지었다.

“계약서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게. 이제 이 결혼은 자네 손에 달린 거야.”

아이반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응시했다. 철저히 아이반을 위한 계약서였다. 미엘린을 위한 조항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미엘린.’

이런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할 만큼 미엘린은 간절했던 것이다. 자신과 데이지가 레스토랑을 떠난 뒤 에르긴이 찾아왔던 것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 대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에르긴은 확실하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타입이었다. 아이반이 에르긴보다 강자인 것이 분명하니 그가 있을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미엘린이 홀로 남을 때만 노리는 것이다.

미엘린이 이 결혼에 진심인 이유를 완전히 이해했다.

에르긴은 확실히 비이상적이었다.

“……고맙네. 나를 생각해 준 자네 마음만큼은 말이야.”

헨리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아이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 것 같았다.

* * *

크리스티나와 백작 부인의 호들갑 속에서 드레스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아이반이 나를 찾아왔다. 무언가 비장한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시간을 내달라는 아이반의 말에 당연하게 응했다.

나는 아이반이 이 계약서를 가지고 올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헨리 왕과 내 이름이 나란히 적힌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왜…….”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왕께선 가족으로서 당연한 염려를 하셨으니까요.”

헨리 왕은 세리나에게 한 짓에 비하면 내게는 아주 신사적이었다. 인간적이기도 했고. 고작 이런 거로 아이반에게 징징거릴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말했어야 합니다. 미엘린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나로 인해서 고초를 겪었다면 당연히 제가 알았어야 합니다.”

아이반이 강경하게 말했다.

“아이반…….”

나는 정말로 괜찮았는데 아이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엘린에게 도움만 받았는데 당신은 나로 인해 이런 불편을 겪었다면 당연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약속한 것처럼 당신을 지키지도 못했고…….”

“저기요, 아이반.”

아이반의 말을 끊어 냈다. 정직하고 금욕적인 아이반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정말로 괜찮았어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반, 사실 데이지의 것을 내가 욕심낼 이유가 조금도 없었어요.”

사실 내가 한국에 살다 와서 이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는 틸리언즈 말고도 가져야 할 게 참 많을 거예요.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큼. 틸리언즈가 라스타나보다 작위가 높은 건 맞아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라스타나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진 못했어요. 신분도 중요하지만 분명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요. 정 필요하다면 돈으로 작위를 살 수도 있겠지요. 이게 가능하다면요.”

아이반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 나는 데이지의 것을 욕심내지 않았어요. 나도 가진 게 많으니까……. 그래서 그 계약서가 괜찮았어요.”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뼛속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온 환경과 태어난 곳이 다르니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건 당연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반이 이해할까?

철저한 신분제로 돌아가는 이 세계에서?

그러나 내 우려와는 다르게 아이반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미엘린의 말이 맞습니다. 왜 아이에게 제가 가진 것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라스타나가 가진 부라면 아이가 셋이 태어나더라도 나눠 줄 게 있을 겁니다.”

“부끄럽지만 맞아요. 저 돈이 정말 많거든요.”

“작위는 굳이 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내려 줄 수 있는 작위가 적어도 세 개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군요.”

“헨리도 괜한 걱정을 했군요.”

사실 그랬다.

물론, 작위가 낮은 경우에 내가 겪은 것처럼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위가 낮더라도 공작의 자식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것도 헨리 왕을 뒷배로 둔 공작의 아이들이라면 말이다.

내가 만약 아이반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애들은 누릴 수 있는 건 전부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이 계약서는…….”

“가지고 있어요, 아이반.”

“파기해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게 있어야 내 마음이 조금 편해요.”

“무슨 말입니까?”

“이 결혼에서 내가 기운다는 건 알고 있어요. 재산이나 작위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나는 한 번 결혼했던 사람이니까요.”

“그건…….”

“아이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렇게 봐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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