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5화 (35/92)

35화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이건 다른 것에 대한 속죄이기도 했다. 아이반에게는 세리나라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운명이 어땠든 간에 아이반은 아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어떤 기회를 잃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소설 마지막에 아이반은 세리나와 아이를 낳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때 아이반은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나는 그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건 그에 대한 속죄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거나 아이반이 이혼을 바라면 군말 없이 나가 주겠다는 약속 말이다.

아이반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소설 속에 들어온 거였고 아이반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넣어 둬요.”

“……미엘린이 바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이 계약서를 파기하고 싶으실 땐 언제든 말해야 합니다.”

“약속할게요.”

아이반이 그제야 수긍했다.

하여튼 착해 빠져서는.

나는 아이반의 인생을 구원했다고 자만하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세리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예정된 해피엔딩을 틀어 버렸으니 나는 이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게 무엇이든 간에.

* * *

순항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업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곳으로는 귀족들이 몰려 있는 제도가 가장 좋았다.

그런데 목 좋은 곳들은 이미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웃돈을 주고 가게를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하려는 ‘호텔에서 내 집보다 더 편안하고 럭셔리한 생활을 즐겨 보세요’라는 모토에 알맞은 건물을 지으려면 부지가 넓어야 했는데 그걸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사는 저택에 시중들어 주는 하인들도 있고 제 손으로 밥도 안 해 먹고 청소는 해 본 적도 없는 귀족들에게 만족감을 주려면 필요한 게 많았다.

그 니즈를 충족시킬 만한 부설 시설들도 동반되어야 했다.

“이걸 어쩌죠?”

“클로린 씨. 혹 빚이 잔뜩 있는 점포도 없었나요?”

“그 점포가 크기가 크진 않더군요.”

웨스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물론, 괜찮은 자리가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요?”

“거의 블록 하나가 텅 비어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유동 인구도 많은 편이고 주변 뷰도 나쁘지 않고요.”

“그럼 사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부지입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라면. 법정에서 내게 숄을 빌려주고 인형의 집을 양보해 준 사람이었다.

“왜 부지가 비어 있는 건가요? 구매하면 되지요.”

“그게…… 사실 그 부지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이혼할 당시에 위자료로 받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전남편의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 하셨지요.”

웨스턴의 말을 클로린이 이어 받았다.

“그런데 법정에서 결정한 일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어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더러운 재산이라고 그 부지로 어떤 수익도 올리고 싶지 않아 했지요. 그래서 팔지도 않고 세도 주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외람된 말이지만 이 일은 부인께서 나서 주시면 어떨까요?”

“제…… 가요?”

“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부정한 이유로 이혼한 이들에게 호의적이신 편이거든요. 만약 부인께서 크로세타 백작을 납작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부지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도움을 주실 수도요.”

아하.

그래서 클로린과 웨스턴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구나. 저 말을 하기 위해서. 왜 표정이 그런가 했다. 내 상처를 이용하려고 하니 죄책감이 앞섰던 모양이다. 이런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 같으니.

“좋아요. 내가 한 번 리엔스터 부인을 만나 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차선책은 찾아야 해요. 제가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요.”

“예, 부인!”

두 사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라. 그녀가 내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예감이 좋았다.

* * *

쇠뿔도 단번에 빼라고 했다고 나는 바로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 연락을 보냈다. 만나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단번에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금 당장 방문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바로 짐을 챙겨서 외출했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혀 대는 그들을 얼른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적적한데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고상한 미소를 덧그렸다. 어딜 봐도 ‘나는 귀부인이오’ 하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간 잘 지냈나요?”

“네, 부인. 부인 덕분에요. 전에 양보해 주신 인형의 집이 큰 힘을 발휘했답니다.”

“그건 별일 아니었습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왠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어서 몇 분이나 망설였다. 먼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 부인께 만남을 청…… 했습니다. 염치가 없지만……. 그리고 다소 불편하실 수도 있는 부탁입니다.”

“편히 말해도 됩니다, 부인. 이쯤 살다 보면 무뎌지는 것도 있는 법이라.”

“……제가 어떤 경위로 크로세타 백작과 이혼을 했는지는 들어 아실 것 같아요.”

“한동안 사교계를 들썩이게 했으니까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아직도 사교계에서 한 목소리 낼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내로라하는 영애들은 전부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주최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 끼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물론, 이건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만나러 온다는 말에 크리스티나가 이야기해 준 것들이었다. 그래서 사교계 소식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는 착한 사람은 못 되나 봐요. 크로세타 백작이 잘 먹고 잘사는 게 싫더라고요. 그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래서 부인께서 가지고 계신 부지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에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미소는 여전했다. 표정에 변화라도 있어야 마음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약간의 동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업으로 에르긴에게 복수를 할 생각인지 자세히 설명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뜨문뜨문 말하기도 했는데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침착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후우…….”

긴 이야기를 끝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야기 잘 들었어요, 부인. 내가 가진 그 부지가 왜 필요한지도 알겠고요.”

“제게 그 부지를 파시는 건 어떨까요?”

“……나는 생각보다 부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어요. 이번에 어떤 일을 시작했는지도 알고 있지요. 부당함을 참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을 시작했다지요? 힘든 이들을 위해서 변호사를 무료로 선임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건…….”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죠. 가진 돈이 많아도 후원을 하고 기부를 한다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벌써 부인의 호의로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클로린에게 나도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기 결혼을 당한 이의 불행을 해결해 줬다고 한다. 나는 후원만 하기로 하고 일임한 일이라서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말이다. 의뢰인의 사적인 영역까지 관심을 가지면 실례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부인이 참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별일 아니에요.”

“꽤 큰 금액을 후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차를 호록 마셨다. 목을 축인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비슷하게 후원을 할까 해요.”

“무슨…….”

“나는 부인을 후원하겠어요. 앞으로 부인이 해 나갈 일들을 후원하고 싶어요. 그 부지를 대가 없이 넘기겠어요.”

“부인……!”

“대신 앞으로도 그런 일을 이어가 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어차피 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이런 호의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부지가 절대로 저렴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냥 받기에는…….”

“부인이 하려는 사업을 통해서 얻는 수익을 지금처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저는 충분해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친정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전남편의 돈 없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됐죠.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도 많다는 걸 알아요. 그런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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