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리엔스터 백작 부인…….”
“세상을 살아 보니 너무 많은 재산도 부질없다는 걸 알겠더군요. 제 아이들도 이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고요. 그 아이들 또한 그 부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욕심이 없어요.”
크리스티나 말로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자식들도 가정 폭력의 희생양으로 목숨을 위협당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좋은 일에 써 주세요.”
“제가 그걸 받을 자격이 될까요?”
“제가 하지 못한 일들을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세상에 리엔스터 백작 부인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세상이 한결 더 살기 좋아질 텐데 말이다.
“어차피 버려두었던 땅이니 제겐 아무 가치도 없어요. 미엘린 부인, 해 줄 수 있겠어요?”
“……정말로 그것으로 충분하시겠어요?”
“네. 진심으로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인류애가 박살 나는 순간이 찾아오다가도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되살아나곤 했다.
“……부인을 알고 지내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나 또한 부인을 알게 되어서 기뻐요.”
예상치 못하게 나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말이다.
용기를 내서 찾아오길 잘한 것 같다.
* * *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내게 부지의 명의를 이전했다는 이야기는 사교계를 강타했다. 저택에 칩거하고 있는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크리스티나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다시 슬슬 외부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괜찮아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내 결혼이 얼마 안 남기도 했다. 이제 내일모레면 결혼식이었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그사이에 아이반, 데이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번 더 했다.
데이지는 친구를 초대했더니 인형의 집을 부러워했다고 이야기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비밀 친구에게 해 준 이야기도 있었다.
원래 아돌프가 죽기 전에 인형의 집을 사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했다. 우물거리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데이지가 얼마나 귀엽던지.
앞으로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내게 말해 주기로 약속도 받아 냈다. 나와 데이지는 무난하게 친해지는 중이었다.
데이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그 거대한 땅을 공짜로 받다니. 역시 될 사람은 된다는 건가?”
“크리스……,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
크리스티나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땅을 팔라고 찾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네가 성공한 걸 보니까 신기하단 뜻이었어.”
“……백작 부인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건 확실하지. 그러니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거고. 게다가 독서 모임에도 초대받았다며?”
“응. 결혼하고 나서부터 나가기로 했어.”
“……진심으로 잘됐어, 미엘린.”
“어?”
갑작스럽게 눅눅해지는 분위기에 크리스티나를 놀라서 쳐다보았다. 나를 놀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크리스티나의 눈가가 물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간 크리스티나와 지내면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탓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래, 크리스……!”
“나는…… 미엘린. 정말 걱정했어……. 네가 이대로 사교계 활동을 접고 저택에서만 생활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만큼 네가 겪은 건 큰일이었고…… 쉽게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크리스티나…….”
“그런데 너는 내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어.”
크리스티나가 코를 훌쩍였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게 거칠었다. 내게 눈물을 숨기고 싶은 듯 고개를 돌린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야. 네가 크로세타 백작 따위 때문에 네가 누려야 할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크리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나는 그냥 네가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앞으로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일 거야, 미엘린.”
“고마워, 크리스티나. 나도 언제나 네 편이 될 거야.”
“알아. 큼. 결혼 축하해.”
크리스티나가 코를 긁적였다.
“행복해야 해. 진심으로.”
“……고마워.”
마음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눈가가 시큰한 게 나도 울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한 눈물을 떨어뜨렸고 그것을 본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애처럼 말이다.
* * *
아이반과 미엘린의 결혼이 하루 앞으로 임박했다는 기사가 제도를 뒤덮었다. 한 블록 지나면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게재한 신문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돌프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공작이 된 아이반과 에르긴과 치욕스러운 이혼으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미엘린. 가뜩이나 이슈의 중심인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하니 온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것이다.
그러니 에르긴과 세리나도 모를 리 없게 되었다.
밤새 술을 마시고도 모자라는지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술을 찾는 에르긴을 대부인이 찾아왔다.
“아버지 보시면 어쩌려고 이러니. 사업은 또 어떡하고! 평일에 이렇게 술을 퍼마시면…….”
“어머니. 미엘린 좀 돌려주세요……. 그 여자 좀 데려다주세요. 미엘린은 여기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저기 있어요.”
대부인이 속이 상한 얼굴을 했다.
여행을 다녀오는 새에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면 긴 시간 체류하지 않는 건데. 망가진 에르긴을 보니 미엘린을 향한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대체 제가 얼마나 잘났다고 귀한 아들을 이런 꼴로 만드는 건지.
그 정도 빌었으면 용서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는 것이지 미엘린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여우 같은 년. 너와 헤어지자마자 공작을 유혹해서 결혼하는 거 보렴. 그년도 바람이 났던 거야.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에르긴, 상심할 것 없다. 곧 공작도 미엘린의 실체를 알고 내쫓을 게 틀림없어.”
“어머니…….”
에르긴이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대부인을 불러온 것은 에르긴의 한 수였다. 대부인이 뭐라고 그러면 미엘린은 과거에 그랬듯이 끌려올 거로 생각했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미엘린은 인체스터 백작 부인이 대부인을 모욕하는 걸 빤히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의 곁에 없었다. 내일 미엘린의 결혼이라니. 그가 여기에 있는데 미엘린이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미엘린…… 미엘린……. 그 여자가 보고 싶어요.”
코를 훌쩍이며 어린아이처럼 우는 에르긴을 대부인이 끌어안았다.
“쉬이. 엄마가 다시 찾아가 보마. 그년이 공작 부인이 되고 나면 공작 가에 가서 너를 만나 달라고 말해 보마. 그러면 되는 거 아니냐.”
에르긴이 오열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로 미엘린은 그를 두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를 보던 사랑스러운 녹빛 눈동자가 마음속에서 가시질 않는데……. 대체 미엘린은 무슨 수로 그 추억들을 잊었단 말인가.
에르긴에게는 나쁜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남았다.
그가 법정에서 미엘린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조차 잊히고 있었다. 본디 에르긴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리나와 불륜을 저지르며 미엘린의 속을 잔뜩 긁어놓았던 것조차도 희미해졌다. 그건 불장난에 불과했다. 진짜 마음은 미엘린에게 있었다.
그러니 크로세타 저택에 들어앉아 있는 세리나는 말도 안 된다. 세리나는 본디 자리로 돌아가고 미엘린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절망에 빠져 헛된 꿈만 상상하고 있던 에르긴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백작님. 가이스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뭐? 그게 누구야. 당장 돌아가라고 하게.”
대부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에르긴이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그게……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집사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뜻이지? 내 저택에서 사람도 못 내쫓나?”
“그게 아니라 찾아온 자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틸리언즈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만나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해 두었습니다.”
에르긴이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그를 대부인이 부축했다.
“틸리언즈의 핏줄? 당장 들이게. 응접실로 데리고 와!”
“네, 백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