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에르긴이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넘겼다. 빠져나온 셔츠를 단정히 하고 얼굴을 한 번 쓸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와 술 냄새 같은 것은 지울 수 없어도 어느 정도 멀끔한 모습이 되었다.
“물도 좀 마시렴.”
에르긴이 찬물을 속에 들이부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준비가 된 에르긴이 침실을 나섰다. 다행히 걷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대부인이 한숨을 내쉬고는 하녀에게 명령했다.
“침실을 깨끗이 치우렴. 내 아드님이 편히 잠드실 수 있도록. 얼른!”
“네, 대부인.”
“그리고 세리나 이 계집애는 어디 처박혀서 보이질 않는 게야? 제 남편이 저 지경인데!”
대부인이 이를 갈면서 외쳤다.
세리나를 며느리로 인정하진 않으면서도 역할은 다 하길 바라는 삐뚤어진 마음이었다. 대부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용인들이 슬금슬금 피했다.
세리나나 에르긴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이 없을 때는 술을 마시고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지금쯤 침실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사용인 중 누구도 세리나를 진정한 백작 부인이라고 생각하질 않으니 그녀를 돌보는 하녀도 별로 없었다.
“얘, 거기 너.”
“네, 대부인!”
“세리나를 찾아서 내게 보내렴. 시켜야 할 일이 있다. 제가 저지른 일은 제가 수습해야 하는 것 아니니?”
대부인이 투덜거렸다.
미엘린도 영 마음에 차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엘린이 나았다. 돈도 많고 주제도 알고 착하기도 하고. 세리나는 돈만 빼돌릴 줄 아는 도둑 아니던가.
미엘린이 이혼하고 돌아와 싹싹 빈다면 받아 줄 마음이 있었다. 공작과 겨우 미엘린 따위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세리나가 미엘린에게 사과하고 백작 부인의 자리에서 싹 물러나야 했다.
지금 고상하게 책을 읽고 있는 남편과는 다르게 대부인은 할 일이 참 많았다. 이 저택과 가문과 에르긴을 위해서!
* * *
가이스가 눈앞의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술독에 빠져 있다가 온 것 같군.’
그래도 정신은 말짱한지 가이스를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말이다. 틸리언즈의 핏줄만이 가질 수 있는 눈동자였다.
“눈동자의 순도가 높군.”
에르긴이 중얼거렸다.
“그렇소. 선선대 공작이 내 아버지였으니 당연한 일이지. 지금 공작이 된 아이반 틸리언즈는 내 동생 놈에 불과하오. 그런데 순서가 잘못되지 않았소? 내가 윗줄이니 그 자리는 내 것이 되어야지!”
에르긴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건방지게 가이스가 말을 낮추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의 남자가 미엘린을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히든카드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말이 옳소.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따진단 말이오? 그 자리는 당신 것이 맞소.”
에르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가이스의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귀족들도 이렇게 인정을 하는데 틸리언즈에서만 받아 주질 않고 있었다.
“도덕성도 없는 작자들 같으니라고!”
“그 자리를 돌려받고 싶은 게요?”
“정당한 자리니 당연하오. 물론, 아이반이 내게 적당한 금액을 내준다면 큰마음 먹고 그 자리를 포기할 생각도 있소.”
“아니,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에르긴이 눈을 빛냈다.
아이반이 그 자리를 잃고 가이스가 공작이 된다면 미엘린은 아이반을 버릴 것이다. 미엘린이 에르긴을 두고 아이반을 고를 이유가 뭐 있겠는가.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반이 공작이라는 것!
그 작위 빼고는 아이반이 봐 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먼저 당신의 후계권을 인정받는 게 먼저여야겠소.”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틸리언즈의 원로 귀족들이 인정한다면 가능한 일이지. 지금 틸리언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원로 귀족은 다섯이오. 그중 셋의 패를 얻으면 되오.”
“호오.”
공작 위 타령을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가이스를 향한 혐오감을 에르긴이 간신히 숨겼다. 하필 이런 멍청이만 그에게 남았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러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동아줄.
지금은 가이스라도 필요한 때였다.
“그 고명하신 작자들의 입맛을 어찌 맞춘단 말이오?”
“어렵지 않지. 아이반 공작의 위신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오. 결혼은 했소?”
“물론. 아이도 있지!”
“틸리언즈의 원로 귀족들은 특히나 깐깐한 자들이오. 아이반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자네에게 후계권을 인정해 줄 것이오.”
“어떤 방법이 있겠소? 나는 아이반을 이혼시키는 것만 생각했소. 아무리 제가 잘났어도 남자는 남자. 좋은 여자를 붙여 줄 생각이었지. 그렇게 해서 이혼한다면 다시 자격을 잃게 되지 않겠소?”
“그것도 좋은 방법이오. 그렇게 되어서 3개월 안에 결혼을 못 한다면 자연스럽게 자네가 공작이 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빠른 게 좋지 않겠소?”
“어떻게?”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원로 귀족들에게 보이는 것이지. 자극적일수록 좋소. 약을 쓰면 될 것이고…….”
에르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여자가 미엘린과 관련 있는 여자면 더 좋겠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요?”
“내가 좋은 사람을 알고 있거든.”
에르긴이 비릿하게 웃었다.
바로 지금 그의 옆에 미끼로 쓸 만한 여자가 있지 않던가. 세리나의 평판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런 데다가 불륜으로 백작 부인이 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세리나가 아이를 가지고도 유산했으며 다시 아이를 가졌다고들 떠들어 댔다. 이미 소문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 세리나와 아이반 공작이 관계를 갖는 걸 들킨다면?
원로 귀족들은 대로할 것이고 어린 데이지를 후계로 세울 수는 없으니 가이스를 찾게 될 거였다.
“그때까지 자네는 조금 멀끔한 모습을 꾸며야겠군.”
“큼! 내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오.”
“그러니 나를 찾아온 거겠지. 지금부터 자네는 건실한 사업가로 탈바꿈하는 것이오. 투자는…… 내가 하지.”
에르긴이 쓰린 속을 붙들고 웃었다.
어차피 미엘린만 되찾아오면 회복될 자산이었다. 일단 가지고 있는 땅을 몇 개 팔아서 가이스에게 투자할 생각이었다. 사실 에르긴은 이 일로 가이스가 공작 위를 되찾는 건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미엘린의 이혼이다.
세리나와 공작이 얽힌다면 미엘린은 단번에 이혼을 선언할 게 분명했다. 그때 아이반은 가이스를 방어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어야 한다. 악재가 겹칠수록 좋았다.
그게 바로 에르긴이 바라는 바였다.
* * *
두 번째 결혼식이다.
사실 미엘린이 에르긴과 올렸던 결혼식도 합하자면 세 번째쯤? 결혼에 대한 설렘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설렜다. 아이반이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 혼을 빼놓는다는 게 저런 건가 싶었다.
잘 손질해서 넘긴 흑발과 톡톡하게 반짝이는 자수정 눈동자. 괜히 남자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듯이 깎아 낸 듯한 미모가 도드라졌다.
침이 꼴깍 넘어갈 외모였다.
아이반이 생긋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고 새로운 버진 로드를 걷는 거다. 우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모인 손님들이 우리가 서 있는 끝을 보고 있었다.
“미엘린.”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아이반…….”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결혼에 감상을 가질 처지도 아닌데 왜인지 그런 기분이었다. 아이반의 손을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려보냈다.
김태진과 결혼하던 내게 잘 살아야 한다고, 행복해야 한다고 속삭이셨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그분들은 내가 김태진과 행복하리라고 믿고 세상을 등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분들 앞에서 약속했던 것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나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이했고 김태진은 내게 철천지원수보다 못한 놈이 되었다.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부모님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파렴치한 놈을 사위라고 아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했다. 그런 인간 말종을 골라서 데리고 간 내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엄마, 아빠.
보고 있어요?
딸 다시 결혼해.
이번에는 제대로 된 놈을 고른 것 같기는 한데…… 끝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이번엔 잘해 볼게. 엄마, 아빠가 바라신 대로 영원히 행복해 볼게. 그러니까…… 내 걱정은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