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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38화 (38/92)

38화

내 이야기를 부모님이 듣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버진 로드를 걸어가던 나는 반대쪽 끝에 선 두 분을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딸을 위해서 여기까지 와 주신 건 아니었을까?

대사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도록 했다. 죽음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까지 서로에게 신실하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하게 했다.

이번 맹세만큼은 지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이반이 나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울지 말아요. 제가 잘해 볼게요.”

“뭘 잘한다는 거예요?”

“뭐든. 미엘린을 울릴 일은 하지 않을게요.”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을 거면서 꽤나 귀여운 말을 늘어놓았다. 아이반의 눈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저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어쩌면 이것 또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반은 세리나와 시간을 보내며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세리나가 지켜 줘야 할 사람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그의 마음이 기울어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아이반은 결혼 생활 내내 충실했으며 세리나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을 훔쳐 온 것이다.

아이반의 인생과 그의 사랑, 행복. 그 모든 걸 말이다. 헨리 왕이 괜히 아이반을 염려한 게 아니었다. 사실 헨리 왕처럼 아이반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도 드물었으리라.

헨리 왕은 내게 찾아와 계약서를 보여 주면 원한다면 파기하겠다고까지 말하는 아이반의 순수함을 아꼈다. 그런 아이반의 마음이 다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내 차례다.

“……나도 노력할게요, 아이반. 당신을 아프게 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이건 우리 둘만의 약속이었다.

아이반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이 내 손에 웨딩 반지를 끼워 주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네 번째 손가락을 채우는 새로운 반지가 생긴 것이다.

자수정이 다이아몬드와 어우러져 자잘하게 박혀 있는 화려한 반지였다. 내 반지에는 자수정이, 그리고 아이반의 반지에는 에메랄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반지 디자인을 고른 것은 아이반이었는데 무엇을 노렸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우리 두 사람의 눈 색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것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마쳤다.

이제 미엘린 틸리언즈가 된 것이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모든 것을, 정말로, 능숙하게. 그러나 그게 오만이었다는 건 금세 밝혀지고 말았다.

아이반의 착실함은 항상 모든 순간에 발휘되는데 내가 방심했던 거다.

* * *

목욕을 하고 나온 아이반을 스타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반은 그의 모든 생활 전반을 챙기려고 드는 스타티스가 보모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스타티스에게 맡겨도 괜찮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스타티스에게는 비밀이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고맙네. 자네는 퇴근 안 하나?”

“전해 드릴 것이 있어서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집사장에게 이야기하니 침실에 두고 나오라고 하더군요.”

스타티스가 손에 들린 것을 흔들었다.

“이건…….”

“신부는 결혼식 전에 어머니로부터 머리 장식을 선물받고 신랑은 결혼식 후에 아버지로부터 브로치를 선물받지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요. 공작 부인께서는 라스타나 문장이 새겨진 머리 장식을 인체스터 백작 부인에게서 선물받으셨습니다.”

아이반이 말없이 손에 들린 것을 쓸어 보았다. 틸리언즈의 문장이 박힌 브로치였다. 브로치 안에는 틸리언즈의 문장이 일렁이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돌프 님께서 아이반 님께 드리려고 만들어 두셨던 겁니다. 타계하신 아버님 대신에 공작님을 챙겨 드리려고 했던 것이지요. 돌아가시면서 제게 맡겨 두셨던 것을 이제야 드리네요.”

아이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돌프는 항상 그렇듯이, 그리고 죽어서도 아이반의 부모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반은 절대로 아돌프를 배반할 수 없는 거다. 항상 아이반을 위해 줬던 아돌프가 바랐던 단 한 가지를 반드시 이루어 주고 싶었다. 데이지에게 공작 위를 물려주는 것.

아이반이 브로치를 움켜쥐었다.

아돌프가 느껴지는 듯했다.

“……고맙네.”

아이반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별말씀을. 아돌프 님께서 보셨으면 정말로 좋아하셨을 겁니다. 버릇처럼 언제 다 키우냐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종종 공작님께서 결혼하시는 모습도 상상하곤 하셨습니다.”

“……그랬었군.”

“제가 너무 긴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제 그만 침실에 드셔야지요?”

“어느 침실 말인가?”

아이반이 목을 가다듬었다. 알면서도 묻는 것을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스타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 부인 침실로 안 가십니까?”

“그게…….”

아이반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무슨…… 문제 있으신 겁니까?”

스타티스가 심각하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돌이켜 보니 그간 아이반은 한 번도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사람이니 욕구가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니. 없었던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스타티스가 시선을 아이반의 아래쪽에 두었다. 그 시선을 느낀 아이반이 가운을 여미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쓸모없는 걱정을 하는 거로 보이는데.”

“……가장 중요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러면 뭐 때문에 공작 부인 침실에 못 가시는 건가요?”

“……미엘린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우리는 모종의 이유로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했지. 그리고 결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계약은 유지되는 셈이야.”

“3개월 안에 잠자리를 가지지 않으신다면 어차피 혼인은 무효가 됩니다. 3개월이 되는 날 신전에서 사제가 나올 거예요.”

대체 무엇이 고민이냐는 듯이 스타티스가 물었다.

“요새 귀족들은 대부분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들은 공작님과 같은 고민은 안 하실 거예요.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의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남지 않았나. 미엘린이 싫어할 일은 하고 싶지 않네. 미엘린은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어.”

“그러면 물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뭐?”

아이반이 눈을 깜빡였다.

“좋은지, 싫은지.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 물어보시면 된다고요. 이렇게 홀로 고민하실 게 아니라.”

“아…….”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군.”

“예, 그러시면 되는 겁니다.”

스타티스가 뿌듯하게 웃었다. 오늘도 숙맥 같은 아이반을 위해서 최고의 조언을 해 줬다고 생각하며. 아돌프 앞에서 절대적으로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반과 미엘린의 침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 * *

“으, 피곤해.”

약식으로 치른 결혼식이라고 하더라도 손님들과 식사 자리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저녁 식사 내내 내 손을 잡고 울먹이는 크리스티나를 달래느라 고생이었다.

백작 부인이 민망한 얼굴로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먼저 귀가하지 않았다면 나는 풀려나지 못했으리라.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내 결혼을 축하한다며 정리가 끝난 서류와 함께 꽃다발을 선물해 줬다. 의미가 가장 무겁고 값진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왕은 저녁 식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선물은 빼놓지 않았다. 지금은 임신 중이라 외출을 삼가고 있는 왕비가 직접 골랐다는 선물이었다.

틸리언즈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과 왕실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새롭게 꾸밀 아이반의 집무실에 두라는 의미였다. 두 가문의 영원한 우정을 의미하는 거라나.

그리고 내게는 왕실 재단사가 직접 만든 망토와 숄을 선물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선물이었다. 왕비의 선물은 의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틸리언즈의 원로 귀족들과 몇몇 지인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손님은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꼬마 천사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분홍색 머리띠를 하고 왔는데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데이지의 드레스는 내가 직접 아이와 함께 골랐다.

데이지는 우리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림 속에는 데이지와 나, 아이반, 그리고 아기가 한 명 그려져 있었다.

‘동생이에요.’

그리 말한 데이지 덕분에 한참 웃기도 했다.

“무사히 끝났네…….”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 위를 굴렀다. 어차피 계약 결혼이었고 피곤하기까지 한데 아이반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반이 내게 애정을 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이르지 않나.

청학동 선비 같은 아이반의 속도는 느릴 것으로 생각했다.

소설도 전 연령이었던 탓에 그런 장면들은 전부 편집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졌던 것은 결혼 이후 한 달 후였던 것 같았다.

이런저런 계산으로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였다.

그래서 편한 모습으로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부터 틸리언즈에 적응을 시작해야 한다. 저택 내부도 익혀야 하고 돌아가는 사정도 알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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