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AW
“원래 머리는 누가 묶어 줬어?”
“엄마가요. 그리고 요새는 엔시가요.”
엔시는 데이지를 돌보는 하녀라고 들었다.
“미엘린은 내가 엄마 얘기하는 거 안 싫어요? 아빠 얘기랑? 숙부님은 제가 엄마, 아빠 얘기만 하면 슬픈 얼굴을 해요.”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도 돼.”
사실 내가 그 사람들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데 슬플 리가 없었다. 그런 걸 데이지가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겠지만. 죽음의 의미도 간신히 이해할 나이 아니던가.
“비밀 친구니까?”
“그렇지.”
“헤헤헤.”
데이지가 배시시 웃고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반 묶음을 하고 원하는 대로 리본을 크게 달아 주니 만족한 눈치였다. 데이지가 내 옆에 붙어 앉아서 재잘거렸다.
“엄마가 이번에는 머리를 이만큼 기르자고 했는데요.”
“그랬는데?”
“기르면 엄마가 이렇게 땋아 준다고 했어요.”
“양쪽으로?”
“네!”
“그러면 머리가 다 자라고 나면 내가 해 줄게.”
“우와! 미엘린도 할 수 있어요?”
“그럼.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을걸?”
데이지는 엄마랑 하려고 했던 것들을 나랑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동글동글한 눈을 깜빡이는 데이지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같이 하자고는 말 못 하는 것도 귀여웠다.
아직은 어색하다 이거지?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뭔데. 말해 봐.”
“내일모레 마리아나가 놀러 오기로 했는데요.”
“그런데?”
“마리아나는 매일 엄마가 머리도 묶어 주고 친구들 오면 같이 피아노도 치고…… 책도 읽는다고 그랬는데요.”
“데이지는 어떤 곡을 잘 치는데? 책은 뭘 읽어 줬으면 좋겠어?”
“미엘린이, 미엘린이 같이 해 주는 거예요?”
이런, 귀여운 녀석.
해 줬으면 좋겠다는 눈치를 팍팍 풍기면서 저렇게 몸을 비비 꼬는데 어떻게 안 해 주겠는가.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고마워요, 미엘린.”
데이지가 머뭇거리다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윽. 힘겨움을 참고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쌕쌕거리는 데이지의 숨소리와 사락거리며 흩어지는 머리카락. 그리고 아이의 조곤거리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내게 스며들었다.
“별말씀을.”
“저는 미엘린이 와서 좋아요. 절대로 미엘린이 그런 걸 해 준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데이지가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엄마처럼…… 여기에 누가 있어서 좋아요.”
그러니까 문을 열었는데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있어서 좋다는 거지? 데이지의 이마에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나도 네가 좋아, 데이지.”
“엄마처럼 어디 안 갈 거죠?”
“그래.”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시에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아기자기한 다과 세트와 내 것으로 보이는 약이 올려져 있었다. 로시에가 테이블에 다과를 차리는 동안에도 데이지는 내 품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데이지가 일어날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그리고 아이반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 아침 잠든 미엘린의 이마에 키스하고 나오는 데 기분이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기분이 좋으시군요.”
“그렇지. 내가 기분이 안 좋을 일이 뭐가 있나.”
“그렇군요.”
뭔가 알았다는 듯이 스타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펼치고 이제 오늘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열렸다. 트레이를 슬며시 밀고 들어온 집사장이 마실 물과 간간이 집어 먹을 다과, 그리고 커피 같은 것들을 두 사람의 책상 위에 준비했다.
그리고는 슬며시 아이반에게 고해 올렸다.
“……데이지 아가씨께서 지금 공작 부인과 다과를 들고 계십니다.”
“데이지가?”
아이반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아침에 머리도 공작 부인께서 해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네.”
집사장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는 매일 아침 공작 부인 침실 앞에 서 있다가 문을 열어 보곤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서곤 했다.
아이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저택 내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사용인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데이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침실 안에 미엘린이 있었다. 데이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리본 끈을 찾아 공작 부인의 침실로 향했다. 머리는 엉망인데 다다다다 뛰어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공작 부인 침실 앞을 몇 분 동안이나 서성거리며 고민하더니 문을 슬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그때, 로시에가 다과 세트를 준비하러 간다고 나왔을 때 다들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랬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외로움을 부쩍 타던 데이지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아이반의 마음이 꽉 차올랐다. 미엘린은 아이반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아이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이 난 집사장이 전해야 할 말을 전하고 집무실에서 물러갔다.
“그렇다는군, 스타티스.”
“예, 저도 들었습니다.”
“미엘린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에르긴 따위에게 그런 짓을 당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지.”
“저도 동의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이견도 없군요.”
“에르긴을 귀족 남성 사회에서 매장할 방법이 필요하네.”
그게 미엘린이 원하던 거였다.
에르긴이 속해 있는 모임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서도 귀족 남성들이 모여서 만든 가장 큰 클럽이 있었다. 드래곤 클럽. 아이반은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온갖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끼리끼리 뭉쳐서 사업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울려 사냥도 하며, 뭔가 감사가 나온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미리 찔러 주기도 했다.
에르긴이 자부심을 품고 활동하는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 그곳은 도덕과 윤리 같은 커트라인이 낮은 편이었다. 저들끼리 모여서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카드를 하기도 했고 종종 여자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 어울려도 고위 귀족들의 모임이라서 다들 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이득이나 재미를 주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기 마련이지요.”
스타티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미 사업 쪽은 부인께서 슬슬 손을 쓰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아무리 백작 저에 돈이 없어도 현금화시킬 수 있는 자산은 넘치도록 있지요.”
“그것도 맞는 이야기지.”
아이반이 진지한 얼굴로 스타티스의 말을 경청했다. 아이반은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본디 기사로 대륙을 떠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본디 이런 술수를 꾸미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어릴 때도 가장 키우기 쉬운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돈이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유령 사업을 만들어서 투자하게 하거나……. 흠.”
스타티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절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 줄 획기적인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매장이라, 매장.”
“…….”
“아. 그런 방법이 있겠군요. 드래곤 클럽은 철저히 이익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서로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지요. 그것도 막대한 피해라면.”
“그게 무슨 말인가?”
“말대로 유령 사업을 시작해서 에르긴이 투자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에르긴이 그것을 클럽까지 끌고 가게 하는 것이지요. 더 큰 자금이 필요하다, 투자처는 없냐. 그래서 드래곤 클럽에서 거액을 투자하고 나면 사라지는 거지요.”
“그건 범죄 아닌가!”
“그렇죠. 그러니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헨리 왕께 다녀오셔야겠군요. 흥미롭게 응하실 겁니다. 그 돈을 전부 국고에 귀속시키신다면요.”
아이반이 헨리를 떠올렸다.
확실히 반대하기보다는 흥미로워할 가능성이 컸다. 안 그래도 드래곤 클럽의 존재를 반기지 않았다. 그 안에서 온갖 범죄 행위가 일어난다나.
소속된 회원을 전부 파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저희끼리 은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헨리가 하려던 개혁이 그들 덕분에 어그러진 적도 많았다. 혹은 범죄자를 풀어 줘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아이반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오히려 반길 것이다.
“일단 추진해 보도록 하지. 그런 일을 하려면 쓸 만한 사업안도 있어야겠군.”
“예. 제가 전문가들을 모아서 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타티스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좋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게.”
“예,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