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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1화 (41/92)

41화

미엘린은 아침 시간을 데이지와 보냈다. 유능한 로시에가 미엘린을 위해서 아주 푹신한 쿠션을 준비해 주었다. 몸을 파묻어도 걸리적거리는 곳 없이 뻐근하지 않도록 말이다.

데이지는 하고 싶은 말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아침 내내 재잘거리며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심까지 먹고 나니 낮잠 시간이 되어 잠들어 버렸다.

데이지의 하녀인 엔시가 아이를 업고 돌아가고 나서야 미엘린도 누울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부인.”

“그러게. 나 진짜 고생한 것 같아. 이렇게 몸이 결릴 일이니? 후우. 그래도 저녁에는 하녀장을 만나 봤으면 하는데.”

“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주무세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로시에가 내 잠자리를 살펴 주고 나갔다.

데이지가 너무 신났다는 게 느껴지던데. 그런 모습조차 안쓰럽게 느껴졌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아이가 느꼈을 공허는 공포에 가까웠을 듯했다.

내가 부모님 집을 정리하기 위해서 갔을 때도 그랬다. 사라진 인기척으로 인해 받게 된 느낌이라니.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데이지는 어린 나이에 겪고 있다.

“후우.”

아무래도 아침에는 한동안이라도 최대한 일정을 잡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데이지가 찾아올 것 같으니 다과나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데이지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를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 찬 아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깨끗한 그런 애정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나저나 데이지 친구 이름은 뭐지? 미리 알아둬야 점수를 딸 수 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걱정 없이 푹 잠들었다.

* * *

딸깍.

“아직 자는 건가.”

“예, 공작님. 피곤하셨나 봐요. 아침나절을 데이지 아가씨와 보내셨습니다.”

“……데이지가 좋아하던가?”

“요즘 들어 가장 즐거워 보이셨어요. 내일모레 마리아나 아가씨가 오시기로 했는데 같이 어울려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미엘린이 무리하는 것 같지는 않았나?”

“전혀요.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엘린에게 고마운 마음이 치솟았다. 데이지는 한 번도 아이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케일린이 놀러 오니 같이 놀아 달라거나 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별로 만난 적도 없는 미엘린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만큼 미엘린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겠지.

“……고마운 일이야. 공작 부인을 살펴서 만약 무리한다 싶으면 내게 말해 주게.”

“예.”

또 한 번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로시에가 나간 것이다. 그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던 미엘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잠에 절어 있던 정신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수록 조금 더 나아졌다. 오렌지색 불빛이 침실 가득히 번져 있었다.

“미엘린?”

“아이반…….”

다 갈라진 목소리로 미엘린이 아이반을 불렀다. 편한 셔츠 차림의 아이반이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미엘린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아이반도 미엘린을 향해 몸을 돌리고 누웠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미엘린.”

“으……, 몇 시예요? 오늘 저녁에 하녀장을 만나기로 했는데…….”

“안 그래도 내일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을 전했습니다. 오늘 미엘린은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해요.”

“……이럴 줄은 몰랐는데.”

미엘린이 중얼거렸다.

“저도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엘린. 처음이라…… 조절이 잘 안 됐던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조……. 아니에요. 그런 얘기는 오늘은 하지 말아요.”

미엘린이 고개를 젓고는 눈을 깜빡였다.

미엘린이 아이반을 힐끗 보았다.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반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그림자가 좀 더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오늘 데이지가 다녀갔어요.”

“들었습니다.”

“정말 귀엽고 착한 아이더군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르게 철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미엘린.”

“네?”

“고맙습니다. 그러나, 만약 부담되거나 그렇다면 언제든지 제게…….”

“별말을 다 해요! 저는 데이지랑 시간 보낸 게 좋았어요. 데이지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던 부분이고 오히려 기대하고 있기도 했고요. 오히려 데이지가 절 받아 줘서 고마운걸요.”

“…….”

“사실 데이지가 절 받아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거든요. 오히려 이렇게 대해 주니 고맙죠. 그만큼 데이지의 눈에 제가 좋은 사람으로 비쳤다는 거니까. 아이들이 더 예민하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고맙습니다.”

“음……. 정 그러면 계약서를 이행했다고 생각해요. 데이지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 줄 것이라는 항목도 있을걸요?”

“헨리가 별걸 다 했군요.”

“예. 세심하신 분이시던데요?”

미엘린이 까르륵 웃었다.

“아참. 내일모레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들었어요. 아이반도 알아요?”

“케일린이 중요한 손님입니까? 그 애는 일주일의 반절을 우리 저택에서 삽니다.”

“정말요?”

“네. 그리고 그 반절은 데이지가 그 저택에서 살지요.”

“아하. 그런 관계였군요. 케일린이 어느 가문의 아이던가요? 그리고 뭘 좋아하죠? 먹는 건 잘 먹나?”

“케일린은 프란시스 후작 가의 막내딸입니다. 늦둥이지요. 그 위에는 언니와 오빠가 있는데 15살, 20살이 차이가 난다더군요.”

“세상에……!”

“그래서 예쁨만 받고 자란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버릇이 없거나 그렇진 않은데 종종 고집을 피울 때가 있어요. 다행히 그 사실을 프란시스 후작 부부도 알고 있고요.”

아이반이 자신이 아는 것들을 늘어놓았다.

데이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알아두었다. 데이지와 함께 살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이반에게 있는 것은 서류상 내용뿐이었다. 데이지의 교우 관계라든가, 그 애의 학습 진척 사항이라든가.

그런 걸 안다고 해서 데이지와 친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케일린이 그런 아이였군요.”

미엘린이 소설을 읽을 때 세리나는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어서 이런 건 조금도 몰랐었다. 그런 여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독자를 끌어당기다니. 역시 떠올려 보면 대단한 소설이 아닐 수 없었다.

미엘린이 데이지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아차. 두 아이 모두 알레르기는 없나요?”

“데이지는 괜찮은데 케일린에게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모르는 게 없네요?”

“준비는 열심히 했는데 데이지가 끼워 주질 않더군요.”

그리고 사실 아이반도 정신이 없기는 했다. 물려받은 틸리언즈가 워낙 덩치가 컸던 까닭이었다. 가문의 일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날들이었다.

“제가 데이지랑 더 친해질 수도 있겠네요. 좋아요. 힘내 봐야지.”

“내일은 뭘 할 예정입니까?”

“음……. 오늘 하려던 걸 해야겠죠. 저택도 소개받고 사용인들과 인사도 나누고. 해야 할 일도 인계받고요.”

“금고의 열쇠는 하녀장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내일 받으면 됩니다.”

“오. 그게 가장 기대되네요?”

미엘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불행에서 벗어나고 나니 점점 그녀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아이반은 그런 미엘린이 좋았다.

“내일 시간이 되면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녁에요? 좋아요.”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은?”

“없어요. 다 잘 먹는 편이죠. 아이반은요?”

“저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데이지도 동행하는 거겠죠?”

“미엘린…….”

아이반이 눈을 깜빡였다. 데이트를 생각하면서 데이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아이반의 반응에 미엘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리 둘이 가려던 건가요?”

“그랬던 거 같습니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건 미엘린이 아니라 저인 것 같군요.”

미엘린이 작게 웃었다. 멍한 표정을 하는 아이반이 웃겼다.

“아직 데이지가 불안정한 것 같아요.”

“……맞습니다.”

“우리가 동시에 나가면 힘들어할 것 같아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한동안은 혼자 두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아이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엘린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엘린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이반이 그렇게 자책할 일도 아니었다. 아이반은 여태 혼자 살아온 게 더 익숙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용병 기사로 일했다면 아이를 접했을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우리 모두 미숙한 부분이 있는 거죠. 그렇게 잤는데도 피곤한 건…… 내가 아직 아이반에게 적응을 못 해서 그렇겠죠?”

미엘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분위기를 풀려는 시도였다. 아이반이 미엘린을 따라 웃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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