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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2화 (42/92)

42화

“그럴 겁니다. 다음은 더 나을 거로 생각해요. 저도 이제 미엘린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잖습니까?”

미엘린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이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어제 끊임없이 질문했던 아이반이 떠올랐다. 미엘린의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굴었던 아이반이 말이다.

“그으…….”

“역시 대화가 중요한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미엘린이 웅얼거렸다.

“미엘린.”

“네?”

“미엘린이 와 줘서 좋다고 말했던가요?”

“아니요.”

“미엘린이 와 줘서 좋습니다. 당신이 내게 와 줘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고른 게 나라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미엘린이 부스스 웃었다.

아이반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미엘린이 어떤 생각과 기준으로 그를 골랐는지 말이다. 아이반은 반드시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저도 고마워요. 아이반, 여기 있어 줘서.”

“좀 더 자는 게 좋겠군요. 많이 졸려 보여요.”

“누구 때문인데…….”

“분명 싫지 않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싫지 않으니까 홀라당 넘어간 거죠.”

미엘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아이반이 미엘린의 이마에 키스했다. 웃는 모습이 아이반의 눈에는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게 비쳤다.

“하지만, 싫지 않은 거랑 힘든 거는 다르더라고요. 저도 어제 처음 알았어요.”

“음……. 그러면 이제는 힘든 건지 물어보면 됩니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걸요?”

미엘린이 피식 웃곤 아이반을 돌아보았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만두려고요?”

“그건…….”

“그러니 고민이 될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아이반.”

“네. 그러면 묻지 않겠습니다.”

아이반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일단 정말로 자는 게 좋을 듯해요.”

미엘린이 뒤척이곤 눈을 감았다.

아이반이 그녀의 아랫배를 끌어 품에 안고는 뺨에 키스했다. 미엘린이 잠들 때까지 토닥여 주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미엘린이 눈을 깜빡이다가 미소 지었다.

이건 그녀가 얻어 낸 행복과 평화였다.

‘미엘린,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현실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았을까? 윤이나는 잘해 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엘린이 하품을 작게 하고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 * *

가쁜 호흡 소리와 각종 의료 기기가 내는 소리가 뒤섞인 병실 안.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운 여자 옆에 남자와 여자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나야…….”

남자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이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이후, 윤이나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김태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윤이나가 이렇게 된 게 전부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죄책감과 후회가 뒤엉켜 김태진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윤이나를 향한 사랑도 분명 있었다. 오지연은 자극적인 장난에 불과했다.

김태진은 언제든지 윤이나에게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김태진을 비웃듯 윤이나는 이혼을 선언했고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 마치 시위하는 것 같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 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김태진이 더듬거리며 윤이나의 손을 붙들었다. 그나마 붕대 밖으로 내놓고 있을 수 있는 일부였다. 뼈가 다 으스러지다시피 해서 그것을 맞추는 데만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지금 숨이 붙어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김태진의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이나야…….”

그리고 오지연도 마찬가지였다. 오지연은 윤이나를 잃었다. 고작 한순간의 욕정에 눈이 팔려서 말이다. 윤이나는 오지연에게 구원 같은 친구였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곁을 지켜 줬고 아플 땐 죽을 사서 찾아오곤 했다. 그랬던 윤이나를 오지연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다.

“내가 다 잘못했어. 이나야, 눈 좀 떠 봐…….”

오지연이 웅얼거리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하는 건 윤이나가 아니라 오지연이었다. 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윤이나가 이런 꼴로 여기에 누워 있단 말인가.

세상에 신은 없는 게 분명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오지연과 김태진이 받아야 했던 건데……. 오지연이 고개를 수그린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였다.

“이나야, 이나야! 내 목소리 들려?”

김태진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소리에 오지연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윤이나가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의사들이 말하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나야!”

오지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윤이나가 오지연과 김태진을 번갈아 보았다. 처절하게 망가진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보던 윤이나가 속으로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게 복수가 되기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건 아마도 꿈일 것이다. 윤이나는 미엘린이 되어 아이반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이 꿈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김태진과 오지연이라니.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윤이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윤이나의 숨이 멎은 것은.

“윤이나아아아악!”

김태진이 고함을 지르며 윤이나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지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침대에 받았다.

“이나야, 제발 일어나…….”

윤이나는 완전히 김태진과 오지연을 버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 * *

어우.

어제 무슨 일인지 꿈속에 오지연과 김태진이 나왔다. 완전 악몽 아니냐. 그것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꿈이라니. 대체 왜 그런 꿈을 꾸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엉망이 된 꼴들을 보니 그리 행복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다시는 그런 꿈 안 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혀를 작게 차고는 하녀장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태어남과 동시에 틸리언즈를 모시게 되었다는 그녀는 저택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부모 세대의 일을 이어받아 틸리언즈를 돌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부심도 컸다.

“여기는 응접실입니다. 앞으로 부인께서 사용하시게 될 공간이지요. 다른 저택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양식의 벽지를 사용했습니다. 직접 장인을 고용해서 만든 것이지요.”

“어쩐지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하녀장의 환심을 얻는 건 쉬웠다. 혼심의 힘을 다해서 맞장구를 쳐 주면 기분이 훨씬 좋아져 내게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공작 부인께서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내가 말 몇 마디로 센스가 넘치며 안목도 뛰어나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을 무렵, 데이지가 찾아왔다. 오늘 아침에도 아침을 알리는 새처럼 다녀가더니 무슨 일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데이지?”

“미엘린! 오늘 저녁에 정말로 외식하러 가요?”

“그러기로 했지. 혹시 데이지는 시간이 안 되는 거야?”

“아니요! 아니요!”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젓고는 발을 콩콩 굴렀다. 내가 양 갈래로 깜찍하게 묶어 준 머리가 데이지의 둥근 머리통에 달라붙어서 열매처럼 달랑거렸다.

“너무 좋아요! 엔시가 얘기해 줬는데 가기 전에 시장에도 들를 거라던데 진짜예요? 그래서 편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러기로 했지.”

아이반과 이른 아침에 잠깐 나눈 대화였다. 이왕 가는 김에 저녁 시장을 구경하면서 가는 건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 결정에 데이지가 이렇게 행복해할 줄은 몰랐다.

“시장 가는 걸 좋아하니?”

“네! 매일요! 아빠가 바쁘면 엄마랑 갔어요. 가서 연극도 보고 길에서 파는 것도 먹어 보고. 그리고 팔찌도 사고!”

“이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연극은 못 볼 것 같은데. 먹을 것도 못 먹고. 그래도 괜찮아?”

“네에!”

데이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행복 지수가 최고치에 다다른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오늘 케일린네서 피아노 교습받는 날인데 빨리 마치고 올게요. 미엘린, 나 두고 가면 안 돼요!”

“그럴 리가 있겠니? 얼른 다녀오렴, 데이지. 나는 여기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마.”

“네!”

데이지가 달려온 것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아가씨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하녀장?”

하녀장이 눈가에 촉촉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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