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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3화 (43/92)

43화

여태까지 자부심으로 가득 차서 설명을 늘어놓던 당당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처연함으로 젖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가씨께서…….”

하녀장이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은 오랜만에 봅니다.”

“그, 그랬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하하하. 제가 뭘 했다고. 그만 울어요, 하녀장.”

여태까지 호감을 얻겠다고 했던 건 아무 소용도 없던 일이었다. 데이지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을. 나와 함께 돌아다니던 하녀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원래도 데이지 아가씨는 잘 웃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웃지도 않으시고……. 그냥 힘없이 계시기만 해서…….”

“그랬군요.”

“이건 전부 다 공작 부인 덕분입니다.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멋쩍은 웃음만 터뜨렸다.

가장 뒤쪽에 있던 로시에가 내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 * *

데이지가 피아노 교습을 다녀왔을 땐, 나와 아이반은 외출 준비를 끝낸 이후였다. 데이지가 그렇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니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서 시장을 더 많이 구경하는 편이 나을 듯해 그리했다.

“어디를 가장 먼저 가 보고 싶니?”

“음!”

다리를 달랑거리며 내 옆에 붙어 앉아 있던 데이지가 손가락을 꼽았다.

“사탕 가게요!”

“사탕은 밥 먹기 전엔 안 되는데?”

“알아요. 하지만, 사 뒀다가 밥 먹고 나서 먹는 건 어떨까요?”

데이지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건 괜찮은 것 같은데? 양치도 잘 하고 잘 거지?”

“네!”

“그리고 다음에는 뭘 하고 싶니?”

“예쁜 팔찌를 파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팔찌를 사고 싶어요. 케일린에게도 팔찌를 사다 주겠다고 약속했는걸요. 케일린은 푸른색이 좋대요. 저는…… 노란색이 좋아요.”

“좋아. 그러면 그런 색의 팔찌가 있는지 찾아보면 되겠네. 그다음에는?”

“어, 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이 데이지가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그 모습을 아이반이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데이지가 저렇게 수다쟁이인지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많군요.’

아침마다 내 옆에서 한 시도 입을 쉬지 않는 것이 데이지인데 말이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베이커리에 가서 빵을 사는 건 어떨까? 저택으로 돌아가서 엔시에게 주는 거야.”

“좋아요!”

“그리고 하녀장에게 들었는데 시장에 예쁜 스타킹을 파는 곳이 있다더구나. 직접 만들어서 파는 건데 레이스 모양이 예쁘대.”

“우와!”

“데이지에게 어울릴 만한 게 있는지 보러 가는 거야.”

“그것도 좋아요!”

“그다음엔 식사하러 가야 할 것 같아. 이러다가는 밥도 못 먹고 돌아올 수도 있거든.”

데이지가 내게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폭 기댔다. 신이 나서는 오늘 교습하러 가서 뭘 했는지 하나하나 열거했다. 아이반도 중간중간 아이의 장단에 맞춰 호응해 주었다.

시장에 도착하기까지 한순간도 말이 끊긴 적이 없었다. 아이반은 이런 분위기가 신기한 것 같았다.

그리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내내 그랬다. 내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데이지와 내 옆에 서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반. 두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로 시장을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데이지는 원하는 대로 사탕과 팔찌, 빵을 샀다. 그리고 스타킹도 여러 켤레 구매했다. 데이지가 고심에 빠진 채로 그것들을 고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저 나이 때는 지금 하는 고민만큼 심각한 것도 없을 것이다.

데이지가 고르는 시간 동안 아이반과 나는 숨을 죽인 채로 기다렸다. 아이가 고민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드니?”

“네!”

저녁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오늘 사 온 것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반도, 나도 데이지에게 식사를 재촉하는 대신에 아이가 충분히 지금의 기쁨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스스로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미엘린, 혹시 리본 묶을 줄 알아요?”

두 볼이 빵빵하게 차도록 음식을 밀어 넣은 데이지가 내게 물었다.

“물론. 리본은 금방 묶을 수 있지.”

“어어, 그러면 내일 선물 포장할 건데…….”

“리본만 묶어 주면 돼?”

“우웅……, 포장하는 거요.”

“좋아.”

데이지가 배시시 웃었다.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는지 발을 동동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이반은 데이지 접시의 음식을 잘라 주고 있었다.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음식을 먹어 치우던 데이지가 식사를 끝낼 즈음에는 어느새 아이가 잠들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데이지가 눈을 깜빡였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데이지를 아이반이 안아 올렸다.

“졸리나 봐요.”

“그럴 만도 했지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고 여태 떠들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이반이 안아 들자마자 목을 끌어안고 도롱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데이지가 내려놓지 못하던 것들을 챙겨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데이지가 이렇게 말이 많은지 몰랐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더라고요.”

“지난 이틀간 데이지가 미엘린의 침실에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알람 시계처럼 정확하죠. 데이지는 아침 10시가 되면 머리끈을 들고 찾아와요.”

아직 내가 그렇게 편하지는 않은지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손짓해서 부르면 도도도 뛰어 들어오는 것이다.

“아이가…… 힘들게 하진 않습니까?”

“아니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와 둘이 있을 때는 아침 시간을 혼자 보냈죠.”

“엄마랑 하던 걸 저랑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미엘린,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전혀 안 그래도 돼요.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 이틀이 아닐 겁니다. 매일 아침 데이지를 그렇게 상대해야 하는 거라면…….”

“아이반, 그 하루 이틀이 아닐 일을 매번 고마워할 건가요? 데이지는 아이반의 호적에 오른 게 아니에요. 아이반과 내 호적에 오른 거지요. 그 애를 보살필 의무는 내게도 있어요.”

아이반의 말을 끊어 내고 말했다.

아이반이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고는 잠시 멈춰 섰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로 내 옆으로 걸어왔다.

“이 마음은 평생에 걸쳐 갚겠습니다. 미엘린을 배반하지 않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으로요.”

“적당한 보상이네요.”

“미엘린, 당신을 만난 게 대단한 행운이라고 말했던가요?”

“그랬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데이지 때문에 그런가요?”

“아니요.”

아이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데이지가 아니더라도 저는 미엘린을 만난 일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미엘린은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아이반은 데이지를 먼저 마차 안에 눕혔다. 내가 들고 있던 짐은 기사가 받아 들었다. 아이반이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달빛 덕분에 아이반의 흑발이 도드라지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흑요석을 갈아서 발라 놓은 듯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아이반이 나를 향해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만큼 짙어진 향기가 내게로 훅 끼쳐 들었다. 아이반이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그 눈에는 어둡게 가라앉은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간질거렸다.

“뭐…… 가요?”

“오늘도 몸이 안 좋습니까?”

“아니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루 푹 쉬고 나니 이렇게 외출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이다. 어제 하녀들이 따뜻한 우유를 푼 물에 근육을 문질러 준 것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미엘린을 안고 싶습니다.”

아이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습니다.”

“아이반.”

“미엘린은 어떤가요? 미엘린도 나와 같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 이 착실하고 귀여운 남자주인공이 나를 향해서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대책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게. 선원을 홀리는 세이렌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했다.

지난밤을 물들였던 열락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이반이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그래도 됩니까?”

“……좋아요.”

나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 제안을 거절할 생각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아마도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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