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쾅쾅쾅!
“문 열어! 이 정신 나간 계집애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제멋대로 구는 거야! 감히 문을 잠가? 이 저택에서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음을 모르는 거냐!”
대부인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굳게 닫힌 침실 문이 열릴 리 없었다. 세리나는 며칠 전부터 문을 열고 나오질 않고 있었다.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대부인이 세리나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후우! 안에 있는 건 맞느냐?”
“예, 부인.”
버릇처럼 문을 걸어 잠근 채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세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제발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쾅쾅대는 소리가 트라우마로 남을 지경이었다.
미엘린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라고?
왜 그래야 하는 거지?
미엘린은 세리나를 외면했다. 그리고 세리나도 미엘린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미엘린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겠다고.
인제 그만 미엘린을…… 놓아줘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시끄러워……. 정말 시끄럽다고.”
세리나가 머리를 푹 숙였다.
“이 문을 당장 열어라! 당장!”
악을 써 대는 목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결국, 하인들이 강제로 연 문을 세리나가 멍하니 응시했다. 악귀처럼 달려와 세리나의 머리채를 휘감은 대부인이 소리쳤다.
“지금 네 남편은 가문을 살려 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
“저를 며느리라고 생각은 하세요?”
세리나가 대부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뭐?”
“며느리라고 생각도 안 하시면서 왜 자꾸 바라기만 하세요?”
세리나가 앙칼지게 외치며 손을 떼어 냈다. 대부인이 표독스럽게 세리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가서 미엘린을 만나서 무릎 꿇고 빌어. 그리고 그 계집애에게 돈을 뜯어 오든 뭘 하든 하란 말이야!”
“하. 미엘린이 바보도 아니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그 계집애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대부인이 이를 바득 갈았다.
“너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할 텐데? 안 그러면 알량한 네 부모에게 퍼붓고 있는 돈. 끊어 버릴 생각이거든.”
세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매번 그랬듯이,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부모가 발목을 붙들려는 모양이었다. 세리나가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이겼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팔짱을 낀 대부인이 세리나에게 말했다.
“얼른 미엘린에게 가서 용서를 빌어. 그 계집애가 하려는 사업을 막든 뭘 하든 해 보라는 말이야!”
대부인의 눈동자가 비정상인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곧 공작 가에서 내쳐질 계집이야.”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가요?”
“네가 알아서 뭘 하려고? 후우. 됐고. 가서 그 계집애한테 빌기나 해. 미엘린이 돌아오고 싶다면 비켜 주겠다고 말해. 에르긴의 옆자리를 비워 주겠다고 말이야!”
“미엘린이 바보예요?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 하게?”
“너는 몰라. 미엘린이 에르긴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맹목적이고 멍청할 정도로 사랑했어.”
대부인이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그러니 그 많은 재산을 내놓고도 아쉬워하지 않았겠지. 대부인은 미엘린이 에르긴을 보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말이다.
그런 감정이 쉽게 잊히고 버려질 리 없었다.
불씨를 뒤적여 바람만 불어넣어도 확 커질 것이다.
에르긴이 하는 일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미엘린은 그곳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밑밥을 잘 깔아 둬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세리나는 머리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대부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세리나는 마차에 태워졌다. 자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 * *
“누가 찾아왔다고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본디 결혼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는 손님맞이도 안 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케일린만 오는 정도였다. 그런데 약속도 잡지 않은 세리나가 들이닥쳤다고 하니 불쾌한 건 당연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으니.
한숨을 내쉬고는 응접실을 준비시켰다.
지금은 다행히 사랑스러운 종달새는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종달새.
본디 데이지의 엄마가 그 애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고 한다. 나는 그게 데이지에게 퍽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응접실로 향하면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의상실에서의 태도를 보았을 땐 안하무인으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리나는 수척한 얼굴이었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미엘린…….”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셔야죠, 부인. 여기는 왜 오셨나요?”
“……전에는…….”
세리나가 고개를 수그렸다.
“널 위해서 그랬어. 네가 나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그땐 미안했어, 미엘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날 위해서 그랬다고?
“제가 왜 부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가요?”
“……미엘린.”
“세상의 중심이 본인이라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원래 여자주인공답게.
“저는 조금도 부인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걸요.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세리나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미엘린.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길었던 만큼 네 마음이 불편할 거로 생각해.”
완전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비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직장이든 사모임이든 꼭 한 명씩은 있다는 또라이 같았다. 정말이지.
그래, 네 멋대로 생각해라.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세리나가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대부인이 보내서 왔어. 아무래도 에르긴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네가 곧 이혼할 거고 그다음에 돌아오면 받아 주겠다는데…….”
이럴 때 할 수 있는 욕이 대체 뭐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긴 했는데…… 에르긴이 뭔가를 하는 건 맞는 듯해. 그래서 알려 주긴 해야 할 것 같았어.”
세리나가 나를 연민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나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에르긴이라는 쓰레기 덕분에 세리나와 내가 동시에 피해자가 됐다고 말이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면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세리나 또한 가해자였는데 말이다.
에르긴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었다.
나와 아이반이 바보도 아니고 그냥 당하고만 있겠는가. 어차피 에르긴에게 붙여 둔 사람도 있으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면 조만간 상세한 보고서가 들어올 거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에르긴이 가만히 당할 것 같지가 않아서 사람을 붙여 둔 거였다.
“알아서 할게요.”
“미엘린……,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실 일이 없네요.”
차갑게 딱 잘라 말하고 일어났다. 더 이상 쓸모없이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곧 있으면 데이지가 일어날 시간이기도 했고 케일린이 올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동생이 많잖아! 갑자기 생긴 아이 키우기 힘들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미엘린!”
“닥쳐. 그 더러운 입에 데이지를 담기만 해 봐, 어디. 네가 어느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보여 줄 테니까.”
세리나가 하얗게 굳었다. 그런 세리나를 노려보고는 하녀장을 불렀다. 손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니 내보내라고 친절하게 말하니 하녀장이 눈치껏 알아듣고는 하녀들을 불러왔다.
로시에가 안쪽을 노려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로시에.”
“네, 부인.”
“곧 케일린이 올 시간이 되어 가네. 간식 준비는 잘 끝났나?”
“네, 부인.”
“1시간 동안 춤 교습을 받은 후에 놀이 시간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로시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세리나와 내가 어떻게 얽힌 관계인지는 하녀들조차 전부 알 정도였다. 로시에가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다닌다니……. 부인,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저런 여자에게 쓸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아, 크리스티나가 5일 뒤에 방문할 거야. 맞이할 준비를 잘 해 줘. 정말 좋은 친구거든.”
로시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인!”
“지금은 케일린과 데이지에게 집중하고 싶어. 내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손님이잖아? 후우. 케일린에게 잘 보여야 할 텐데 말이야.”
“케일린 아가씨가 새초롬하시기는 해도 되게 착하세요.”
“그래?”
케일린과 데이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세리나나 에르긴에 대해서는 또다시 잊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내 일상을 침범하는 건 정말로 싫었다.
내가 신경 쓰고 싶을 때, 그리고 신경 써야만 할 때 그들을 떠올리고 싶었다.
다행히 곧이어 일어난 데이지는 내 혼을 쏙 빼놓았다. 케일린이 나를 처음 보는 날이니 공주님처럼 예뻐야 한다나. 케일린이 오기 전까지 데이지의 코치를 받으며 치장을 해야 했다.
하녀들이 웃음을 참으며 데이지의 코치를 따랐다.
대충 핑크 공주가 되긴 했는데 봐 줄 만했다.
하하. 분홍 머리에 분홍 드레스라니. 요술공주 밍키도 아니고……. 하지만, 데이지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제 알겠다.
너 분홍색 좋아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