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래서요?”
데이지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내게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데이지가 바랐던 대로 책을 읽어 주던 중이었다. 케일린은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을 빛내며 내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두 아이와 있다 보니 인생이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공주님이 어떻게 했게?”
“어떻게에?”
데이지가 귀엽게 말을 따라 하면서 내게 몸을 기울였다.
“왕자님한테 뽀뽀를……!”
“뽀뽀를!”
“꺄아!”
케일린이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둘이 사귀나 봐!”
“둘이 좋아하나 봐!”
케일린과 데이지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외쳤다. 그러고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공주님, 왕자님 얘기가 최고구나. 동화책을 골라 준 하녀장에게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케일린은 처음엔 경계심 강한 고양이처럼 굴긴 했지만, 금방 나아졌다. 그건 아마도 데이지의 코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케일린도 분홍색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오늘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교습도 잘했고 책도 잘 읽고 아이들과 시간도 즐겁게 보냈다. 케일린과 데이지가 바라는 대로 소꿉놀이도 함께 했다. 케일린은 소풍을 가고 싶다고 말했고 데이지도 동의했다.
결국, 다음에 공작 저를 방문할 때는 소풍을 가기로 약속도 해 버렸다.
저택 부지가 넓은 거로 알고 있는데…… 뒤에 있는 숲은 잘 정돈되어 있나…….
아이들은 정말로 무한 체력이었다. 케일린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로시에가 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으으으으…….”
“정말 고생하셨어요, 부인. 아가씨들이 정말로 좋아하시던걸요?”
“그랬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뒤에 스테릴 숲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저택이 스테릴 숲을 끼고 있어요. 본디 틸리언즈의 부지였는데 초대께서 그 경관을 해칠 수 없다고 하셔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요.”
“그래? 애들이 소풍을 가고 싶대.”
“앗. 여름이니 숲에 가시면 시원하실 거예요! 들어가다 보면 거대한 호수도 있고 토끼나 사슴 같은 동물들도 있고요. 아가씨들이 뛰어놀기 좋은 들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관리인을 오라고 해 둘까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소풍을 이야기하는 데이지의 눈이 그렇게 반짝이는데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풍 준비는 하녀들이 다 해 줄 텐데, 뭐.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을 때 아이반이 왔다.
“오늘 고생했다고 들었습니다, 미엘린.”
결혼하고 일주일 동안은 손님맞이를 하지 않는 거라길래 휴가를 보내려고 했던 건 맞다. 그러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아이들과 보내는 편이 더 나은 듯했다.
속세의 찌듦과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 그 천진함이 내게는 위로가 되었다.
“아니에요, 아이반.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계산이나 술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듣다 보면 모든 게 괜찮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번에도 고맙다고 말할 거라면 사절할게요.”
장난스럽게 말하니 아이반이 옅게 웃었다. 아이반이 로시에를 손짓으로 물렸다. 우리 둘만 남으니 아이반이 내 다리 쪽에 앉아 발을 들어 올렸다.
“아이반?”
아이반이 내 발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시작했다.
“제가 뭉친 근육을 푸는 방법은 잘 알고 있습니다.”
“으……, 거기 정말 시원해요.”
그러게. 맞는 것 같네.
노곤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의자에 젖히고 편히 있는데 아이반의 손이 거슬러 올라왔다. 종아리를 꾹꾹 누르고 그다음에는 그 위쪽.
“아이반……?”
아이반을 부르며 눈을 뜨니 나를 위에서 덮고 있는 아이반을 볼 수 있었다. 아이반이 내 다리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내게 몸을 붙인 아이반이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마사지를…… 해 준다고…….”
아이반이 눈을 휘어 미소 지었다. 나의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외모를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아이반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미엘린.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대체 뭐가 잠깐이면…….
거짓말!
“저녁도 아직 안 먹었고…….”
“그래서, 싫습니까?”
대체 저런 질문을 하라고 누가 가르친 거야! 싫고 좋고를 따지자면 당연히…….
“……좋아요.”
모든 걸 포기한 내 대답에 아이반이 작게 웃었다. 내 목덜미에 자잘하게 키스한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내 입술을 머금었다. 여전히 손으로는 내 다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아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엘린…….”
결국, 저녁도 먹지 못하고 신혼을 불태우고 말았다. 하녀들이 중간에 몰래 넣어 준 트레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단 꿀에 절인 과일들과 달콤한 음료, 소화하기 쉬운 핑거푸드까지.
그것을 나눠 먹다가 다시 얽혀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반의 입술에 묻은 꿀이 정말로 달아 보였으므로.
* * *
그래도 적응이 되는 건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반과 식사를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아이반은 어제저녁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조금 미안했는지 모든 음식을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데이지는 2시간 후에나 일어날 테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아. 어제 세리나가 다녀갔어요.”
“백작 부인이요?”
“네. 그 백작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해서 들은 게 있나요?”
“……흠. 가이스가 백작을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이스?
아. 원래 그 남자는 에르긴이 아니라 다른 후원자를 찾아서 일을 벌였다. 세르미온 남작이 그 주인공이었다. 세르미온 남작은 세리나를 통해서 뜯어낸 공작 가의 자산으로 일을 벌인 거였다.
가이스는 세르미온 남작에게 공작 가의 자산을 크게 뜯어내 주겠다고 했고 거기에 넘어간 거였다. 그 사건은 세리나가 자신의 염치없는 가족을 잘라 내기 위한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르긴을 고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남자는 후계권을 인정받으려고 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예상합니다.”
“그리고 아이반에게 결함을 만들어서 자기가 공작 위를 차지하려고 하겠죠. 에르긴이 그를 도울 거고요.”
아이반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긴 백작 옆에 사람을 심는 건 어떨까요?”
“스타티스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으로 매수할 겁니다. 이런 면에서는 꼼꼼하거든요.”
“그랬군요.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내게도 알려 줘요.”
“약속하겠습니다. 다만, 미엘린도 혼자서 그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아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법정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눈치였다.
“정말로 약속할게요,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좋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정말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이루어진 대화였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데이지와 케일린에 대한 이야기, 오늘 숲 관리인이 올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소풍을 갈 건데 함께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
“아. 미엘린이 하려는 사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이제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클로린이 신경 써 줄 거예요. 전문 경영인을 고용했거든요. 다음 주에 한 번 올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아이반은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주책맞은 헨리 왕께서 들라고 하시니 가 볼 생각입니다. 미엘린도 함께 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건 거절했습니다.”
“왜요?”
“쉬어야 하는데 왕성에 가면 피곤해질 테니까요.”
아이반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벌써 피곤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조금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헨리가 뒤에서 수작을 부려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최대한 만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걸 마음 쓰고 있었어요?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헨리가 처음에 제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켕기는 게 있다는 겁니다. 비겁자 같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렇게까지 질색을 하는 걸 보니 아이반답다고 느껴지면서 귀엽기도 했다. 마치 나를 지키기 위해서 아르릉거리는 작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아이반이 작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평소 성정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될 사람이라고 오냐오냐 자라서 그렇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고작 5살 많은데 하는 짓은 수십 년 묵은 뱀 같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이반은 헨리가 나를 언제든지 해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계약서 사건이 아주 큰 충격이기는 했나 보다. 아이반이 이를 아드득 갈았다.
“알았어요, 아이반. 그런데 왕께서 섭섭해하지 않으시겠어요?”
“……큼.”
아이반이 그건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조차 귀엽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