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이반. 정말로 이럴 건가?”
“자네도 이만 내게서 졸업할 때가 됐어. 내 아내는 내버려 두게.”
“왕비가 보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만 더 있다가. 미엘린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고.”
왕비를 들먹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아이반을 보며 헨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정도로 강경한 태도로 보아 무슨 말을 해도 넘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됐네. 아, 참. 요새 에르긴 백작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던데.”
“알고 있네. 가이스가 찾아갔다더군.”
“쯧. 왜 그런 일에 목숨을 거는지. 대귀족이나 왕족의 후계권에 잘못 덤벼들었다가는 목숨 보전하기 힘들다는 걸 모르는군.”
헨리가 관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 그는 공작 부인 덕분에 목숨을 지켰지만 그러지 못한 왕자들이 태반이었다. 만약 헨리도 시의적절하게 왕성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더 큰 변고를 당했을 거였다.
왕성으로 돌아온 선대 왕비가 대대적으로 피의 숙청을 강행하지 않았더라면 헨리는 이 자리에 무사히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대 왕비의 손을 빌려 형제 셋의 목을 베었고 자신의 손으로 형제 둘의 목을 베었다. 왕녀들은 전부 타국으로 보냈다. 결혼 동맹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차마 그들의 피까지 손에 묻힐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헨리가 결벽적으로 축첩을 금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왕이라면 정부를 한둘 데리고 있기 마련인데 헨리는 깨끗한 사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모든 위험을 미리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도 했다. 헨리가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시기를 함께 지나온 사람이기에 더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거지. 가이스는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네. 문제는 에르긴 백작인데.”
가이스는 나라의 녹을 먹는 귀족이 아니지만 에르긴은 경우가 다르다. 헨리 왕에게 속해 있는 그를 아이반 마음대로 벌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크로세타 백작이 공작 부인에게 어떤 무례를 저지르건 그다지 관심이 없었네. 여태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그 정신 나간 작자가 공작가의 후계권에 관여하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헨리 왕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자네 원하는 대로 해도 좋네. 크로세타 백작이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 작위를 거둬들일 생각도 하고 있으니.”
그 순간 헨리 왕과 아이반은 동시에 미엘린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사회적으로 매장해 주세요.’
그 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섬광처럼 깨달은 것이다. 사회적, 귀족적인 죽음. 그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 미엘린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반과 헨리 왕이 눈을 마주쳤다.
“……좋은 생각이군.”
“공작 부인에게 주는 가장 좋은 결혼 선물이 되겠군.”
헨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엘린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작위에 대해서 직접 입에 담는 것은 반역이다.
작위를 내리는 것은 헨리 왕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었다. 미엘린은 그런 걸 입에 담는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표로 끌어낸 것이다.
“죽여 달라는 게 이런 말이었군.”
아이반이 중얼거렸다.
“자네는 참 똑똑한 부인을 얻은 것 같아. 나는 공작 부인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드는군. 절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거든.”
“……나는 당하기만 한다는 말인가?”
“약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웬만한 일은 참아 넘기는 편이니까.”
“가진 것이 많아 그렇다네. 우리처럼 가진 것 많은 이들이 전부 마음에 담아 둔다면 어떡하나.”
“가진 것 많다고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 않나. 그 또한 억울한 일이야. 그러니 자네에게는 공작 부인이 딱이라는 거지.”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본인이 당하는 건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가족이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사람이지. 그러니 자네를 지켜 줄 사람도 필요해.”
어느 정도는 헨리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이나 들고 가지.”
“또 일을 떠넘기려고 그러나?”
“그러지 말고 새로 신설되는 부서를 맡아 주면 이렇게 부르는 일도 줄어들지 않겠나.”
아이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네. 그리고 신설되는 부서는 내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야. 가정복지부라니. 그런 걸 왜 내게 떠넘기려는 건가?”
이번에 헨리가 신설하려는 부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는 정복 전쟁이 활발했다. 헨리의 선조도 거기에 끼어서 왕국의 땅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내부는 피폐해졌다.
어느 정도 수복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버림받은 아이들과 홀로 남은 노인들과 가족과 헤어져 여전히 만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
겉만 수복되었지 속은 여전히 곪은 그 상태였다. 헨리 왕은 민심을 보살피기 위해서 새로운 부서를 창설하기로 했고 거기에 아이반을 꽂아 넣으려는 속셈을 품었다.
“돈을 안 해 먹을 작자가 자네밖에 더 있나? 좋은 의미로 하려는 일인데 돈을 횡령해서야 쓰나.”
헨리 왕이 혀를 찼다.
“그러니 생각 좀 더 해 봐.”
“나 좀 내버려 두게.”
아이반이 고개를 젓고는 헨리 왕을 피해서 도망쳤다. 지금 공작 가 일을 배우고 적응해 나가는 것도 바쁜데 그것까지 떠맡을 순 없었다. 절대로.
* * *
“이건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할 수 있겠니?”
데이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접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 별 접기를 가르치던 중이었다.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왕성으로 가는 아이반을 배웅한 뒤 홀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즈음에 데이지가 일어났다. 눈 뜨고 씻자마자 머리끈을 들고 온 데이지에게 아침을 먹이고 머리를 묶어 주었다.
얼마나 했다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잘되는 것 같아?”
“으잉……, 아니요. 미엘린, 구겨져 버렸어요.”
“괜찮아. 할 수 있을 거야. 다시 한 번 해 볼래?”
데이지가 전투 의지가 타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들어 낸 작은 별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색을 입힌 종이를 잘게 잘라 별을 만들어 유리병에 채워 두는 게 마음에 든 눈치였다.
반짝반짝 알록달록하니 아이들 눈을 빼앗을 수밖에.
데이지가 오밀조밀한 손으로 별을 접는 것을 보면서 책을 넘겼다. 이런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데이지는 종이접기를 하고 나는 책을 읽고. 여유롭고 한가로운 한때였다.
“이번엔 된 것 같아?”
“음……, 이 정도면 된 건가요?”
데이지가 동글동글하게 구겨진 별을 내밀었다.
“이렇게 생긴 별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괜찮은 것 같아.”
“다음엔 더 잘할 거예요!”
데이지가 주먹을 움켜쥐고는 다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가씨, 간식 드시고 하세요. 잘 드셔야 힘이 나서 별도 접으실 수 있는 거예요.”
로시에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별 접기를 가르쳐 주고 나서 로시에는 한 번에 성공했다. 때문에 데이지는 로시에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로시에의 말에 데이지가 울상을 지었지만 좋아하는 간식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데이지. 천천히 먹으렴. 그러다가 탈 나겠어.”
“네에.”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마른기침을 토해 내는 데이지에게 우유을 마시게 했다. 다행히 데이지는 제대로 된 별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별이 든 유리병을 들고 케일린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아침 일과가 마무리된 것이다.
“부인, 관리인을 들라고 할까요?”
“응. 이젠 나도 일을 해야지. 종이는 잘 보관해 둬. 데이지가 유리병을 다 채우고 싶다고 하니.”
“네, 부인.”
로시에가 자리를 정리하는 사이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여태 데이지와 편한 옷을 입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옷을 다 갖춰 입었을 즈음 관리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