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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7화 (47/92)

47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별말씀을.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는가?”

관리인이 모자를 말아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기 편한 짙은 갈색 옷을 입은 관리인은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로시에에게 듣기로는 평생 숲을 관리하며 지내 왔다고 했다.

전쟁통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것 같다고.

흰 머리를 정갈하게 다듬은 신사였다.

다만, 고아원에서 데려온 남자아이를 하나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그 아이가 나중에 관리인이 죽고 나면 그 뒤를 이어서 관리인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로시에는 이 저택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녀장이 내게 붙여 주지 않았나 싶긴 했다.

관리인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말했다.

“살펴 주신 덕에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괜찮습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만약 불편함이 있다면 언제고 말해 주게. 내가 이렇게 자네를 부른 것은 아이들이 소풍을 가고 싶다고 해서야.”

“스테릴 숲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스테릴 숲이 지금 아이들이 놀기에 적당한가?”

“순한 짐승들만 사는 곳이라 괜찮습니다. 아가씨들이 노시기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정돈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그리고 스테릴 숲 안에 작은 별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도 자네가 관리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녀를 보낼 테니 그곳을 단장하도록 하게. 곧 있으면 데이지가 그곳에도 가고 싶어 할 것 같거든.”

“예, 부인.”

안 그래도 스테릴 숲에 있는 별장에 대해서 아이반에게 듣고 나서는 데이지가 가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반도 데이지가 좋아할 거라고 동의했다.

“먹을 것도 해 먹을 수 있는 곳인가?”

“예, 부인. 다만, 식료품을 채워 둔 지는 오래되어서 비어 있을 겁니다.”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고맙네.”

“아닙니다, 부인.”

내게 인사를 올린 관리인이 돌아갔다. 다행히 데이지와 케일린이 원하는 대로 소풍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걱정했는데 말이다.

“먹을 건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것이 좋겠지.”

“네, 부인.”

“그걸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보게 하면 어떨까?”

“흠……, 주방장에게 확인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들이 하실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로시에가 염려를 표했다.

“모양을 만드는 건 할 수 있을 거네. 주방장이 준비만 다 해 주면 될 것 같아. 우리도 있을 테니 다른 건 만지지 못하게 하면 되고. 데이지가 즐거워할 듯한데.”

“……케일린 아가씨도요. 그러면 주방장에게 준비 가능한지 확인해 볼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 가문에서 일하는 주방장들은 대부분 자부심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해서는 자기 주방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내가 공작 부인이라고 해도 확인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후작 부부에게 연락을 해서 갈아입을 여벌 옷을 준비해 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일을 할 땐 반드시 옷이 더러워지기 마련이거든.

* * *

이상하게 아이반은 매일같이 왕성에 도장을 찍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을 처리하고는 헨리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곤 했다.

그게 3일 정도 이어지자 나도 확인을 안 해 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왕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나요?”

저녁을 먹던 아이반이 멈칫했다. 식탁 위에 식기를 내려놓고는 아이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쓰이게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큰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요, 아이반.”

내가 직설적으로 말하자 아이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왕께서 직책을 맡기려고 하신다는 건가요?”

“네. 뇌물을 받지도 않고 예산을 횡령하지도 않을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제게 강요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지금 공작 가 일로도 벅찹니다. 그런 일까지 맡아 줄 정신머리도 없고요.”

“아하.”

그래서 헨리 왕이 집착적으로 구는 거였구나. 어떻게든 떠넘기려고. 헨리 왕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혀를 내두르며 질색을 하는 아이반을 보니 어떤 방법을 모색해 주긴 해야 할 듯했다.

가정복지부라.

왕국의 내치에 힘을 쓰겠다는 헨리 왕의 선택은 옳았다. 전에는 결국 떠밀려서 아이반이 이 일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흠.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왠지 이 일에 딱 잘 어울릴 것 같은 적임자가 떠올라 버렸다.

“적임자를 추천해 드리면 어떨까요?”

“헨리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겁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어떨까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라면…….”

사교계에서도 대쪽같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성품은 어디 한 군데 모난 곳이 없으니 왕국의 가장 아픈 부분을 잘 헤아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가요?”

“백작 부인에게는 전에도 몇 번 직책을 맡기려고 하셨지만, 부인께서 전부 거절하셨습니다. 받아들일지 모르겠군요.”

“이건 받아들일 것 같아요.”

“한 번 헨리에게 이야기를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잘 해결되어서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데이지는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지금 별 접기에 빠져서요. 저녁 대신에 샌드위치를 먹였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식사 끝나고 데이지를 보러 가는 건 어떨까요?”

“그래야겠군요. 관리인과 이야기는 잘 끝났습니까?”

“다행히 관리를 잘하셨나 보더군요. 어린아이들이 놀기에 적합한 곳이 있다고 했어요. 별장도 이용 가능하고요. 하녀들을 보내서 속을 단장하라고 지시했으니 곧 이용할 수 있을 거예요.”

“데이먼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별장에 가는 거면 하룻밤 자고 오는 겁니까?”

“그러는 게 좋겠지요? 아이반도 시간이 난다면 같이 가는 편이 좋겠어요.”

“당연히 가고 싶습니다. 이 일만 해결되면 이렇게 바쁘지도 않을 것 같네요.”

아이반이 울상으로 말했다. 헨리와 아이반의 관계는 겪을수록 재밌는 것 같았다.

“내일은 크리스티나가 오기로 했어요, 아이반. 잊어버렸을까 봐.”

“시간이 된다면 함께 점심을 먹는 것도 좋겠지만…… 내일은 왕성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해해요.”

아이반이 우울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 나갔다. 물론, 아이반이 그 일을 침실에까지 끌어들이진 않았다. 우울한 얼굴은 어디로 갔냐는 듯이 활기찬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아이반은 두 얼굴의 사나이가 분명했다. 으득…….

* * *

크리스티나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잔뜩 안고서 방문했다. 아직 데이지가 눈 뜨기 전의 시간이었다. 마음이 급했는지 이른 시간에 방문한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내가 잘 지내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선물을 살펴보던 내가 물었다.

“나를 만나러 온 거야, 데이지를 만나러 온 거야?”

“널 만나러 온 거지. 데이지가 기분이 좋아야 너도 좋을 테니까.”

크리스티나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아하. 날 잘 봐달라는 뇌물이다?”

“그런 거지.”

“다행히 데이지하고는 잘 지내고 있어. 되게 귀엽거든.”

“귀엽다고 다 괜찮은 게 아니잖아.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그렇다니까.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나간 세리나가 다녀갔다고 그러니 그렇지. 그 여자는 왜 온 거래?”

신랄한 말에 선물을 정리하던 로시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티나는 그러든 말든 자기 말엔 틀린 데가 없다는 듯이 매우 당당했다.

“에르긴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아서 왔대. 대부인이 보내기도 했고.”

“그 집구석은 어떻게 멀쩡한 구석이……. 너는 왜 그런 놈을 골라서 이 고생이야?”

“부모님이 고르셨지 내가 골랐나.”

“그건 또 그러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에르긴이라면 아주 학을 떼는 건 크리스티나도 똑같았다.

“후우.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네가 어린애랑 잘 지낼 수 있을지 사실 걱정했거든.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잖아.”

“정말로 귀엽다니까? 너도 만나 보면 반할지도 몰라.”

“내가 어린애한테 반할 일이 뭐가 있어. 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크리스티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안 일어났니?”

“곧 일어나서 올 거야.”

“온다고? 어디를?”

“여기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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