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크리스티나가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이번에는 분홍색 리본을 손에 꼭 쥐고 슬그머니 들어온 데이지가 나를 불렀다.
“미, 미엘린…….”
모르는 어른이 있으니 낯선 모양이었다.
“괜찮아, 이리 와. 이쪽은 내 친구 크리스티나야.”
쭈뼛거리면서 걸어와 내 옆에 달라붙어 앉는 데이지를 크리스티나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나는 데이지를 똑바로 앉히고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묶고 싶어?”
“어제 했던 머리요…….”
데이지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어제는 양 갈래로 디스코 땋기를 해 주었는데 단발인데도 머리가 땋아지자 데이지가 아주 좋아했다.
“네가 머리를 묶어 주는 거야?”
“응. 이것도 꽤 재밌다고.”
“……그걸 데이지가 마음에 들어 해?”
“물론이지. 그렇지, 데이지?”
“미엘린은 머리 잘해요…….”
“얘 왜 이러는 거야? 원래도 그래?”
“아니. 낯 가리는 거야. 그러니까 좀 웃어.”
내 지적에 크리스티나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만들어 냈다. 데이지가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보다가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내가 머리를 땋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됐다.”
“우와…….”
데이지가 다시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크리스티나를 향한 경계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마치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 같았다. 크리스티나가 비장의 한 수를 꺼낸다는 얼굴로 쌓여 있는 선물을 가리켰다.
“다 네 거야, 데이지.”
“내…… 거?”
“너한테 주는 선물이지. 다 가져도 좋아.”
데이지의 눈이 흔들리는 걸 난 보았다. 크리스티나에게 경계를 풀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는 거의 다 넘어갔다고 봤다. 선물을 싫어할 어린이는 없다.
“가 볼래?”
내 질문에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에가 데이지를 번쩍 안아서 선물 앞에 내려 주었다. 낯을 가리느라고 온종일 꾸물거릴 데이지를 도와준 것이다.
로시에가 데이지를 도와 선물을 뜯었다.
선물의 정체가 드러날 때마다 느낀 건데…….
“네 안목이 아닌데?”
“조카들의 도움을 받았지. 덕분에 돈을 몇 배는 써야 했어.”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데이지의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탄성을 지르는 데이지에게서 나는 느꼈다.
크리스티나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데이지가 반짝이는 얼굴로 로시에에게 물었다.
“이거 정말 다 내 거야?”
“그럼요, 아가씨.”
“우와!”
“좋으세요?”
“응, 엄청! 요새 데이지는 좋은 일만 있어서 너무 좋아. 이거 하나는 케일린한테 줘도 될까?”
“그건 손님께 물어봐야지요.”
데이지가 시무룩한 얼굴로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크리스티나가 시크하기 그지없게 말했다.
“크리스라고 불러.”
결국, 크리스티나도 데이지에게 무장해제당하고 만 것이다. 데이지가 배시시 웃었다.
“크리스…….”
그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데이지를 보는 눈빛이 훨씬 부드러워진 것이다.
“선물을 줬으니 다 네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해도 돼.”
“우와!”
“데이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말을 따라서 꾸벅 인사한 데이지가 로시에에게 달려갔다.
“이건 케일린 줄 거야! 이것도.”
“알겠어요, 아가씨. 따로 챙겨 둘게요.”
“응! 너무 좋아.”
그렇게 크리스티나는 성공적으로 신고식을 마쳤다.
* * *
“리엔스터 백작 부인?”
“그래. 네가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인물이지. 절대로 돈을 빼돌릴 일도 없고. 이런 일에 잘 어울리기도 하고.”
“받아들일까 모르겠는데.”
“이야기는 꺼내 봐. 미엘린 말로는 이런 일이면 받아들일 거라더군.”
“미엘린……? 공작 부인이 관여한 건가?”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흠.”
헨리가 턱을 쓰다듬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니. 자네 부인이 점점 마음에 들어서 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부인이 리엔스터 백작 부인과 인연이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다면 부인이 대신 부탁을 해 줄 수도 있겠군.”
“헨리…….”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 내 이야기보다 공작 부인의 이야기가 더 잘 통할 수도 있지 않겠나.”
헨리의 주장에 아이반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남편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
“헨리?”
“장난이네. 아무튼, 큰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지.”
아이반이 한숨을 흘렸다. 어떤 상을 내릴지 조금도 기대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짐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비가 꼭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미엘린을?”
“그래.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라.”
“……이야기는 전해 보도록 하지.”
“그래. 살롱 초대장을 보낼 예정이라고 하니 놀라지 말라고 말이라도 전해 두게.”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의 내정 실세가 미엘린을 좋게 봤다고 하는데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왕비는 사교계를 뒤에서 은밀하게 주무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실 헨리 왕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 권모술수에는 이골이 날 만도 했다.
“왕비와 미엘린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
헨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이반도 일부분 그걸 인정했다.
* * *
다행히 데이지와 크리스티나는 금방 친해졌다. 크리스티나가 그간 조카들을 돌봐 왔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드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슬픈 것이 있다면 점심이 지난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는 거였다. 창문을 뚫을 기세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데이지가 절망의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소풍!”
“내일은 안 되겠다, 그렇지?”
데이지가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호수에 물이 불었을 것이고 관리인도 내일은 안 되겠다고 연락을 보낸 터였다.
지금 마구간 천장도 뚫린 바람에 밖은 난리라고 들었다. 여기나 안전하지. 그리고 사람들은 내일 밤에나 비가 그칠 거라고 했다.
과학적으로 발전하진 않았어도 이곳에도 날씨를 예측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데이지가 나를 불렀다.
“미엘린…….”
“내일은 케일린도 못 올 거야. 그렇지?”
데이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노는 건 어떨까?”
“으응?”
“홀에 천막을 치고 노는 거지. 야영하는 것처럼 말이야.”
“어, 어……. 야영?”
데이지가 울먹이는 걸 그만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피를 마시던 크리스티나가 멈칫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왜, 어린애들을 위해서 집 안에 천막을 치는 게 유행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걸 재현해 볼 생각이었다. 천막만 치는 게 아니라 그 안을 야영하는 듯 꾸며 볼 생각이다. 벽난로가 있으니 불을 피우면 그럴듯할 것이다.
“로시에, 어차피 비가 오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벽난로를 피우긴 해야 하잖아?”
“그렇습니다, 부인.”
“잘됐네요. 자, 데이지. 어때?”
“……숙부님도 같이?”
“좋아.”
“크리스는?”
크리스티나가 움찔했다. 그런 크리스티나를 보면서 물었다.
“날도 흐린데 자고 갈래?”
“뭐?”
“괜찮잖아. 바쁜 일 없다면 말이야.”
“크리스으으으.”
데이지가 크리스티나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이의 눈빛에 넘어간 크리스티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너무 좋아요!”
“그러면, 데이지. 어른스럽게 케일린에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소풍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말이야. 내일 못 만나게 되어서 아주 속상하다고 편지를 쓰는 거야. 진심을 담아서. 어때, 할 수 있겠니?”
“네!”
데이지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가 당장 편지를 써야 한다고 엔시를 조르는 통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
“……너 잘한다.”
“그래?”
“응.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 애들은 겪어 본 적도 없으면서.”
“다행히 데이지가 말이 통해서 다행이지, 뭐. 아, 너도 저택에 연락해야 하지 않아?”
“아무도 없어서 괜찮아. 또 영지로 내려가셨거든.”
“아하.”
크리스티나가 편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런데 비가 정말 끝없이 오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나도 크리스티나를 따라서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비가 쏟아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