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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9화 (49/92)

49화

“행복한 거지?”

크리스티나가 여상하게 물었다. 마치 너 밥은 먹었냐고 묻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지금 묻기엔 이르긴 하겠지만, 지난 일주일 괜찮았던 거지?”

“……그래.”

“공작님은 괜찮아?”

“좋은 사람이야. 진심으로.”

“……다행이다.”

크리스티나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쓰디쓴 얼굴로 말했다.

“네가 결혼하고 나서 이틀은 잠이 안 오더라고. 네가 다시 저택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올 것 같아서.”

“크리스…….”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건 아는데도 그렇게 되더라고.”

“이젠 걱정 안 해도 돼, 크리스티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알아, 아는데…….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숨기지 말라고.”

목이 멨다.

내가 혹시나 나의 불행을 홀로 짊어진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고마워, 정말로. 약속할게.”

“그래.”

크리스티나가 다시 커피잔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내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나 보다. 크리스티나의 눈가가 붉었다.

크리스티나가 걱정하고 있을 듯해 가장 먼저 만난 거였는데. 오늘도 생각했다. 크리스티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리고 아이반은 아쉬울 거라고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크리스티나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헨리 왕에게 풀려난 아이반이 비를 맞으면서도 저택으로 돌아와서였다.

더 이상 헨리 왕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다.

아이반은 다음 날 우리가 정한 일정에 동의했다. 데이지의 야영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때아닌 장대비는 우리에게 즐거운 휴식을 가져다주었다.

* * *

비가 쏟아져도 쉬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에르긴이 깔끔하게 꾸민 가이스를 위에서 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다행히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발해서 아이반과 비슷하게 보였다. 역시 사람은 옷을 제대로 입어야 태가 난다면서 에르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 처자식은 오지 않겠다고 했다고?”

“아내가 고집이 세서 말이네.”

“흐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일을 진행하고 그 이후는 기다리는 수밖에.”

“후우. 어떤 사업을 시작할 생각인가?”

“대충 구상을 해 두었지. 자네는 건실한 이미지를 살리는 게 좋아. 내가 후원자로 있으니 더욱 그렇지. 그래서 고아원 사업을 꾸밀 생각이네.”

“고아원? 정확히 말해 보게.”

“소문에 의하면 지금 헨리 왕이 복지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더군. 그러니 지방마다 고아원을 지어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하는 거지.”

“그게 수익이 날 리 없을 텐데?”

가이스가 입맛을 다셨다. 돈이 가장 최고인 줄 아는 멍청한 욕심쟁이를 에르긴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모을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고아원 사업에 들어가는 돈은 푼돈에 불과하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겠네. 왕께서 이 사업을 인가하시고 나면 예산이 나올 걸세.”

“예산?”

“그래. 종종 사업을 도와주시기도 하시거든. 그렇게 왕의 시선을 끌고 나면 사람들도 모여들 거야. 너도나도 후원하겠다고 하겠지. 귀족들이 체면 차리는 건 좋아하지 않나. 그 돈을 자네가 얼마 빼돌린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느냔 말이야.”

“아……!”

그제야 가이스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에르긴의 말대로였다. 일만 잘되면 많은 돈이 모여들 거였고 이미지 세탁을 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내 몫을 떼어 주는 것도 잊지 말게.”

“물론이지! 이 모든 걸 갚아 줘야 하지 않겠나!”

에르긴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게 가이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리나를 아이반에게 붙여서 미엘린에게서 떼어 내는 거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라고 믿고 있었다. 미엘린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뭐가 겁나겠는가.

‘이제 문제는 세리나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인데.’

에르긴이 혀를 찼다.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패가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세리나는 요새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들었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만 늘어 가고 있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라 그러는 건지.

얼마 전에 미엘린을 만나러 다녀온다길래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못해도 미엘린과 아이반 사이를 살펴볼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에르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돈만 빨아먹고 있으니.

헨리 왕의 교지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내쫓았을 것이다.

에르긴이 가이스를 돌려보내고 하녀장을 찾았다.

“지금 세리나는 뭘 하고 있지?”

“침실에…….”

“당장 데리고 오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야.”

“네, 백작님.”

세리나는 미엘린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나는 자신을 미엘린과 동등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에르긴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다고 말이다.

에르긴은 세리나보다는 서로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세리나의 이기적인 가치관까지 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지. 곧 세리나가 흐느적거리는 몰골로 에르긴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이전에는 저 모습을 청순하다고 생각했으니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던 거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세리나가 차갑게 물었다. 자신이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에르긴을 꼬집어 말하는 거였다. 세리나는 저택에 와서 남작 가에 활로를 열어 준 이후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침몰해 가고 있었다.

“세리나. 당신은 여전히 미엘린을 친구라고 생각하나?”

“네.”

세리나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만약 미엘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뛰어들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그 애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세리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사실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에르긴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동정심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에르긴은 그의 불행을 떠올리기 위해서 애썼다. 미엘린이 떠난 이후로 엉망이 된 그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소문이요?”

“아이반 공작이 미엘린을 때린다는 거야. 그래서 밖으로도 잘 안 나온다는 거지.”

“뭐라고요?”

세리나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세리나가 얼마 전에 만났던 미엘린을 떠올려 보았다. 차가운 표정으로 세리나를 노려보고 있던 미엘린을 말이다. 그게 만약에 아이반 때문에 그런 거였으면?

세리나 때문에 에르긴을 떠났고 그로 인해 만난 사람이 그 지경이라 화가 난 거였으면 말이다. 아이반이 정말로 미엘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고 미엘린이 그것을 간신히 견디는 상황이라면!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세리나가 고민도 없이 말했다. 에르긴이 입술을 휘어 올렸다. 여전히 세리나는 멍청하고 쉽게 속는다.

“아이반 공작을 유혹해서 전말을 알아봐 줘야겠어, 세리나.”

“아이반 공작을요?”

“그래. 미엘린은 바깥 활동을 잘 하지 않아도 아이반 공작은 다르지. 어디에서든지 접근할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되나요?”

“아주 큰 힘이 되지. 아이반 공작을 유혹해서 넘어오게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우리가 한 이야기를 누설해서는 안 돼. 발을 뺄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미엘린은 끝이야.”

에르긴이 한숨을 과장해서 내쉬었다. 세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르긴의 기색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인 듯 서글프기만 했다.

“미엘린에겐 정말 미안해.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놈에게 갈 일도 없었을 텐데.”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에르긴의 진심.

좌절이 반복되자 미엘린을 향한 마음은 집착으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가져야겠다. 끝까지 미엘린이 에르긴을 거절한다면 아이반도 그녀를 갖지 못하게 하리라.

“세리나, 네게 미엘린의 운명이 달렸어. 거기서 평생 살게 할 순 없잖아. 듣기로는 헨리 왕도 동조해서 미엘린을 협박하고 있다더군.”

“……가면을 쓴 악마들 같으니라고.”

“조건부 결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미엘린이 데이지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아이 낳는 걸 포기하는 대신에 결혼식을 올렸다는군.”

“미엘린은 대체 왜…….”

“그만큼 절망적이었던 거지. 자신을 다 버리고 싶을 만큼.”

세리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엘린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세리나가 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에르긴은 말 몇 마디로 속인 세리나를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저렇게 순진하니 자신에게 넘어왔겠지.

“세리나, 당신이 일만 잘해 준다면 미엘린도 고마워할 거야. 당신을 이해하게 되겠지.”

“그렇겠죠? 제 진심을 알아봐 줄 거예요.”

세리나의 자기 연민과 죄책감을 이용하는 건 이토록 쉬웠다. 에르긴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세리나.”

두 가해자가 다시 한 번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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