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50화 (50/92)

50화 @AW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 편지를 써 달라는 헨리 왕의 요청을 나는 받아들였다. 대신 헨리 왕은 아이반을 비롯한 드래곤 클럽의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에 동의했다고 한다.

자기한테도 이득이면서 뭘 선심 쓰는 척.

하여튼 능구렁이.

“으……, 피곤해.”

“잠을 제대로 못 잔 거야?”

“아. 그건 아닌데 자세가 잘못되었나 봐.”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를 마시며 몸을 의자에 늘어뜨린 크리스티나가 내가 쓰는 편지를 힐끗 보았다.

“뭐야. 리엔스터 백작 부인?”

“응. 부탁드릴 일이 좀 있어서. 갚을 일은 안 생기고 부탁드릴 일만 생기네.”

“무슨 부탁을 드리려고 그러는 건데?”

나는 아이반에서 전해 들은 사정을 설명했다. 크리스티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게 부탁이라고? 선물이 아니라? 남들 들으면 부러워서 뒤로 넘어가려고 하겠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닐 테니까.”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나의 청춘이 가장 아쉬웠다. 그게 미래와 행복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을 땐 조금도 아쉽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어그러진 지금에서는 고스란히 후회로 남았다.

“그러면 바라는 걸 들어주면 되지.”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청춘을 돌려받고 싶으실 것 같은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가만히 참고 있었던 세월이 후회로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가 하는 일들을 응원해 주시는 거고.”

“흠. 그건 우리 영역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 이것도 부탁이야. 바라시는 바가 아닌 걸 해 달라고 하고 있잖아.”

아쉬웠다.

뭔가 선물을 해 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빙의해서 들어오긴 했지만, 이 세계에는 마법이나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건 차차 생각해 보자. 일단 편지를 마무리해. 헨리 왕이 너를 독촉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곤 편지를 마저 썼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다. 내가 괜한 일을 벌인 것도 같고.

* * *

우려와는 다르게 틸리언즈 공작 가로부터 왔다는 편지는 오랜만에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웃게 했다.

“왕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일을 하시려나 보군.”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편지를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공작 부인은 거듭 이런 부탁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백작 부인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공작 부인이 걷고 있는 행보만 봐도 그렇다.

이혼하고 나서도 시댁에 휘둘리는 이들과는 다르게 미엘린은 단번에 그들을 잘라 냈다. 그리고 에르긴을 망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와 미련 없음이 리엔스터 백작 부인조차 부러웠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이혼하고 나서도 남편이 죽자 장례식을 다 치러 줘야 했다. 그들의 끝이 아무리 거지 같았고 지옥이었어도 남편의 장례식이라는 이유였다.

자식들도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장례식장이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는 얼마나 고역이었겠는가.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아야 했다.

그런데 미엘린은 에르긴이 죽는다고 해도 욕 한마디 해 주고 말 것 같았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미엘린을 응원하고 돕는 이유였다.

게다가 미엘린은 똑똑했다.

백작 부인이 받아들일 만한 제안만 하고 있었다. 그간 헨리 왕은 대쪽같은 백작 부인에게 여러 직책을 제안했지만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다.

요새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 사실 자선기금 모금을 한다면서 저들끼리 술 마시고 떠드는 귀족들의 행태에 얼마나 질려 있었던가.

그런 걸 토대로 왕성에서 예산을 받아 챙긴다니. 수작이 빤한 짓거리였다. 정말로 선한 행위를 하려는 자들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이런 일만큼은 절대적으로 깨끗한 이들을 등용하고 싶다는 왕의 포부는 옳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제대로 해야겠군.”

“예?”

“왕성으로 갈 것이네. 헨리 왕을 뵙고 와야겠어.”

“예, 백작 부인.”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간 웅크리고 있던 사교계의 실세가 일어난 것이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추종하는 수많은 귀부인이 그녀의 뜻을 따를 것이다.

이번 가정복지부의 장관으로 헨리 왕은 가장 적합한 자를 낙점했다. 알현 요청을 한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급하게 안으로 불러들인 것은 당연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으로 헨리는 걱정을 한 움큼 덜어낼 수 있었다.

* * *

“으음…….”

벽난로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총동원되었다. 정말로 야영 분위기를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때? 마음에 드니?”

점수를 기다리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데이지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숙부님! 벽난로에 감자를 구워 먹어도 되나요?”

“뭐?”

“큼.”

귀족 가에서는 해 본 적 없었을 그런 일을 데이지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물론 나였다. 그런 게 캠핑의 묘미 아니겠어? 그래도 벽난로에서 고기 굽자는 말은 안 했잖아.

“그래도 되나요?”

데이지가 눈을 반짝이면서 아이반에게 매달렸다. 아이반이 곤란한 얼굴로 집사장을 보았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던 집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합니다. 벽난로 청소를 해 두길 잘했군요.”

“우와아아아!”

데이지가 방방 뛰었다. 그래, 너도 군감자 맛을 알 때가 됐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나 크리스티나나 승마복 차림새였다. 이렇게 바닥에 앉아 있는 게 어색한 눈치였다. 아무리 돗자리를 깔았다고 해도 실내인 건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 이런 건 처음 해 봐. 공작 가 가풍은 자연스러운 모양이지?”

“그거야 우리가 만들기 마련이니까. 크리스티나 불평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봐. 이렇게 먹는 건 또 분위기가 다르다니까?”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젓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편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나와 달리 크리스티나의 자세는 어정쩡했다.

“편하게 앉아, 편하게.”

“그래, 그래.”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니던 데이지가 크리스티나의 품에 폭 안겼다. 그러고는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크리스!”

“왜?”

“직접 샌드위치를 해 먹을 수 있대요!”

“그래서?”

“데이지는 손이 작아서…….”

“알았어, 알았어. 이렇게 해 주면 되는 거지?”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고는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분위기에 맞춰서 챙모자를 쓴 데이지가 헤헤 웃었다. 아이가 팔에 끼고 있는 바구니가 흔들거렸다.

바구니에는 데이지가 소풍 갈 때 가려고 쌌던 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애착 인형과 빗, 머리끈. 그런 것들이 말이다. 크리스티나가 데이지에게 끌려가 익숙하지 않은 샌드위치를 만들 무렵, 아이반과 나는 의자에 앉아 음료를 나눠 마셨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누가 하겠어. 나나 하지.

“그래도 색다른 재미가 있죠?”

“그러게요. 데이지가 정말 좋아하네요. 비가 와서 슬퍼할 거로 생각했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마다 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죠?”

“하면 되지요, 아이반. 어렵지 않아요. 그냥 있는 것들 가져다가 하면 되니까요. 다음에는 케일린을 초대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비가 조금 덜 오면요.”

“케일린도 좋아하겠군요. 그 애는 데이지하고 똑같아요. 옷부터 머리 장식, 구두까지. 둘이서 똑같은 걸 사고 싶어 하더군요.”

“어쩐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비슷한 것 같았어요.”

“그럴 수밖에요.”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데이지와 케일린이 하는 게 귀여운가 보다.

“다음에 쇼핑 갈 때는 케일린도 같이 가는 것도 좋겠군요.”

“후작 부인을 청해 함께 가도 좋을 겁니다. 후작 부인도 좋아하시거든요.”

“꼭 생각해 볼게요.”

“아 참. 왕비께서 살롱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만약 초대장이 온다면 놀라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요.”

“안 가도 되는 건가요?”

“미엘린이 바란다면요. 그 정도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웃음을 터뜨리곤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왕비님을 만나 뵙고 싶은걸요. 합리적이고 좋은 분이시라고 들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분명 제게도 친절히 대해 주실 거예요.”

세리나에게도 그랬듯이 말이다. 왕비는 왕실의 평화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왕비께서 부당한 일을 하신다면…….”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내게 말을 꺼내는 거고.”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만나서 좋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면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한 말대로 제 선에서 처리했겠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혹시 거기에 리엔스터 백작 부인도 초대받나요?”

“보통 초대받으면 세 번에 한 번꼴로 나온다고 하더군요. 왕비 전하께서도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랬군요.”

어떻게 사교계에 끼어들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손대지도 않고 일이 술술 풀려 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여자주인공 자리를 빼앗은 거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여자주인공이 되었다는 거지. 내 인생은 여자주인공 버프를 타고 아주 물 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에 거기에서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