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나와 아이반이 대화를 끝마칠 즈음 데이지가 다 완성된 샌드위치를 가지고 달려왔다. 야영엔 라면인데. 여기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 주방장에게 토마토 스튜를 부탁해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와 야영에 잘 어울리는 토마토 스튜도 왔다. 아이반은 데이지가 직접 만들어서 준 샌드위치를 고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데이지가 직접 제게 이런 걸 줬어요.”
“그랬네요.”
“이럴 줄은 몰랐는데…… 데이지가 다 컸나 봐요.”
“음……, 그런가 봐요.”
“데이지가 요리에도 소질이 있나 봐요. 귀족 가의 영애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데이지가 바란다면 주방장을 시켜야 할까요?”
“아이반?”
“네?”
“데이지는 6살이고 크리스티나와 함께 샌드위치를 만든 것뿐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나 보다. 열심히 샌드위치를 만든 데이지가 실망스럽지 않도록 말이다.
속을 채우고 위를 덮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도 데이지에게는 일생일대의 작업으로 느껴지고 있을 것이다. 골몰한 데이지를 보면서 크리스티나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이가 엉덩이를 쑥 빼고 집중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반주로 노래도 부르고 데이지가 춤을 추는 것을 구경했다. 데이지의 댄스 상대가 되어 준 것은 아이반이었다.
“아콩!”
데이지가 발을 밟아도 아이반은 웃기만 했다.
“숙부님 안 아파요?”
“조금도.”
홀에 있던 피아노의 덮개가 열렸다. 야영에 어울리는 악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데이지에게 약속한 대로 피아노를 쳤다. 다행히 악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떠듬거리면서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아무도 내 부족한 피아노 실력을 지적하지 않았다. 빗소리마저도 즐거운 오후였다.
* * *
크리스티나는 비가 잦아들자마자 귀가했다. 크리스티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귀가를 미룰 수가 없었다. 데이지는 크리스티나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하루 사이에 정이 크게 들었던 모양이다.
데이지를 달래 재우는 것은 아이반의 몫이 되었다. 아이반은 데이지를 재우고 침실로 돌아왔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미엘린.”
“저도 그래요. 정말 즐거웠어요.”
“예전 생각이 나더군요.”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용병 기사로 일했던 과거를 꺼내기를 저어하는 이유는 귀족 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돈을 받고 기사로 재직하는 것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사라면 응당 국가에 충성하고 정식 기사 서임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도 아이반의 과거가 언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이반이 대륙을 떠돌아다닌 게 맞는다면 용병 기사만큼 좋은 직업도 없었다. 한 몸 지킬 수도 있고 원하는 곳에 어디든지 가 볼 수도 있고 말이다.
가문에서도 쉬쉬하면서 아이반이 그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포장했던 것 같았다.
“예전 생각이요?”
“네. 과거에 사실…… 용병 기사로 일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
“혹 거부감을 느낍니까?”
“아니요. ‘그래서 체력이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큼. 체력은…… 보양식을 먹는 게 좋겠습니다. 미엘린이 바란다면 대륙을 뒤져서라도 먹을 걸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거로 진지해지지 말아요, 아이반.”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아이반도 같이 웃었다.
“중요한 건 제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어딜 가 봤나요? 즐거웠나요?”
“세상의 많은 걸 보고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배웠지요.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도 배웠습니다. 저는 그때 떠난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재밌었을 것 같아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미엘린과도 떠나 보고 싶군요.”
“여행을요?”
“네. 즐거울 겁니다. 제도는 너무 좁아요. 이곳에서 아웅다웅 싸우며 살아가는 이들이 안타까울 정도죠. 여기에는 없는 것들이 멀리에는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아이반이 좋아했던 것들을 함께 나눠 보고 싶네요.”
새삼 아이반에 대한 존경심과 연민이 치솟았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저택으로 돌아와 갑작스럽게 공작이 되었다. 일에 적응하기도 힘들 텐데 결혼도 하고 데이지와 나도 부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 왕도 상대하고.
소설에서 보면 아이반도 사업적 능력이 뛰어난 편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얼마나 큰 노력이 숨겨져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아이반은 우리와 시간을 보내거나 헨리 왕에게 불려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집무실에 있었다. 서류를 보든, 책을 보든 간에 말이다.
스타티스는 거의 밤낮 없이 아이반과 붙어서 일을 하고 있었고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 일도 잦았다.
그런데도 아이반은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듯 덤덤하게 일했다.
성실하고 묵묵하게.
“아이반. 또 좋아하는 게 있나요?”
“……음. 데이지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습니다. 그 애가 세상 아픈 일 없이 웃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도 그래요. 그리고 또요?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미엘린에게서 크로세타 백작이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괴롭히는 게 싫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이반의 일상에 내가 끼어든 것이다. 아이반은 내게서 에르긴이 떨어져 나가는 게 스스로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반이 나를 보는 눈이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분명했다. 아이반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또요? 아이반을 위한 걸 말해 봐요.”
“지금까지 말한 것도 저를 위한 일입니다. 미엘린과 데이지가 행복해야 저도 행복하니까요.”
“그래도요. 아이반, 원하는 게 정말로 없나요?”
“음…….”
아이반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미엘린과 있는 게 좋습니다. 미엘린과 식사하고 곁에서 잠들고. 그 모든 것이 좋습니다.”
이건…… 고백이지.
아이반의 잘생긴 얼굴에 분홍 물이 들었다. 아까 나눠 마신 와인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상황이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고 있었다.
“미엘린은 어떻습니까? 저와 보내는 시간이 혹 불편하진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러면요?”
아이반이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그리하였듯이 진심을 말해 달라는 거였다. 왠지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나는 낡았고 감정은 닳아빠졌다.
누군가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곁에 누군가를 둘 생각도 없었다.
아이반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저 막연한 다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반은…….
저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감정을 파헤치고 싶은 것처럼.
“아이반……, 나는…….”
“미엘린.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싫은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 대답에 아이반이 꽃처럼 웃었다. 흰 얼굴 가득히 번지는 미소가 내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이반은 진심이다.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간 보였던 수많은 정황 증거가 하나의 퍼즐로 완성되어 사랑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미엘린.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면 됐습니다.”
“나는…… 내가 끝까지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요?”
“괜찮습니다. 그때까지도 당신이 내가 싫지만은 않다면요.”
“아이반…….”
“미안한 얼굴이네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은걸요.”
괜찮을 수가 있나? 돌려받지 못하는 감정을 주기만 하는 건데도? 그럴 리가 없는데 아이반은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행복에 나도 전염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이반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 내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디지 않았다.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 한 번 배신당한 마음이 용기를 내질 못하고 있었다. 서글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나를 이런 겁쟁이로 만든 두 사람을 향해 분노도 잠시 치밀었다.
“그렇게 미안합니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아이반. 이건 내 문제예요. 그래서 더 미안한가 봐요.”
심장이 부스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아이반이 그런 나를 위로했다. 혹시 아이반은 날개 없는 천사가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반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손끝에 입을 맞췄다.
아이반의 하늘하늘한 숨결이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무엇이든 말해 봐요.”
지금 같은 심정으로는 아이반이 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을 듯했다.
“키스해 주십시오.”
아이반이 내 손가락을 뜨거운 살덩이로 휘감았다.
“윽!”
나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구미호가 따로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