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왕비는 몇 번이고 내게 전언했던 대로 살롱을 열었고 나를 초대했다. 이전부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오늘 살롱 모임에 누가 참석할지 궁금할 뿐이었다.
이왕이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이쪽입니다, 공작 부인.”
시녀장이 내게 친절하게 말했다.
왕비가 내게 호감을 보이니 왕성의 사용인들도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왕비가 살롱을 여는 곳은 유리 온실이었다. 화려하게 피운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정원사가 하나하나 배려했을 것이 분명한 배치였다.
정중앙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해서 왕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공작 부인이에요!”
“이번에 틸리언즈에 왕비 전하께서 관심을 표명하셨다고 하더니 참석하게 됐군요.”
“이제 실세는 틸리언즈라는 말이 있지요. 아이반 공작이 무사히 공작 위 방어에 성공했으니까요. 사업만 승승장구한다면야…….”
“틸리언즈와 라스타나의 결합 아닌가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결합이지요.”
들리라고들 하는 말인지.
아, 내게 호의가 있음을 보여 주려는 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시녀장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았다. 이런 모임에서는 어느 테이블에 앉는지도 중요하다지? 모임을 개최하고 있는 왕비도 참 피곤하겠다 싶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척하며 차를 마셨다.
여기서 아는 척 면서, ‘아, 제가 그 틸리언즈 입니다! 제가 그 유명한 미엘린이에요!’라고 하기에는 내 낯짝이 얇았다. 사람들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게 바로 텃세라는 건가.
자기들이 먼저 다가왔으니 네가 고개를 숙여라. 뭐, 그런 거?
내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은 하지 않고 수군거리기만 하는 귀부인들을 모르는 척하고 있을 때였다. 왕비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온실로 들어왔다.
만삭이라 외부 활동은 거의 안 한다고 하더니, 정말로 출산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헨리 왕이 안절부절못하며 왕비를 떠받들고 다닐 만했다.
사실 소설에서도 왕비는 유독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여전히 소녀 같은 귀여움을 간직하고 있다나. 정말로 그랬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부푼 배가 더 위태로워 보였다.
둥그스름한 볼은 붉었고 커다란 푸른 눈동자는 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하늘하늘하게 늘어뜨렸다. 왕비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췄다.
왕성의 내정을 쥐고 있는 실세가 아니던가.
게다가 헨리 왕이 지금 첫 아이를 목 빠지게 고대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설설 길만 했다.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왕비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공작 부인. 내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군요.”
고개를 조아려 예를 갖췄다.
이런 모임에서 주최자가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큰 의미를 지니었다. 유치할진 몰라도 작은 모임에도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이제부터 이 모임에 참석한 자들은 내게 말을 걸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신부를 졸라서 이 자리에 오게 했으니 내가 고맙지요, 공작 부인. 아이반이 워낙 무뚝뚝한 성정이에요.”
왕비가 보슬보슬한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 왕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아이반을 알고 지냈다고 하더니 정말로 친한 모양이었다.
“그 애가 어릴 때부터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죠. 만약에 아이반이 그 일로 속상하게 한다면 언제든 내게 와서 말해도 좋아요. 그러면 일을 잔뜩 줘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닙니다, 왕비 전하. 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이반이 그럴 일을 할 리 없다고 믿기도 하고요.”
아이반이 무뚝뚝하다고?
그 섹시광돌이가?
아이반을 몰라도 아주 모르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도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을 죽은 척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아이반은 정말 말을 잘 듣는 남편이었다.
내가 힘드냐고 묻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로 묻지 않는다.
아득.
그냥 매번 싫은지, 좋은지만 묻는 것이다. 그 강철 같은 체력은 줄어들지도 않나. 아무튼, 그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모르는 왕비로서는 저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참견을 했어요. 신혼부부 사이의 일은 모르는 건데.”
왕비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은밀한 의미를 담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공작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아주 유쾌한 사람이군요.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 봐요, 공작 부인. 아이가 곧 태어날 텐데 자주 들러서 제 말동무가 되어 주면 좋겠군요. 물론, 공작 부인의 시간이 된다면요.”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콕 집어서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이의 대모를 내게 맡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왕비의 말동무를 해 달라니. 그건 왕비가 나를 점찍었다는 말이었다.
나를 왕비의 주변 사람으로 들이겠다는 것.
“영광입니다, 왕비 전하.”
그리고 그걸 나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영광까지야. 리앤스터 백작 부인이 이번에 직책을 맡아 주는 데 큰 보탬이 되어 줬다죠?”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염원하시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건 나아가 왕국과 국민을 위한 일이니 돕는 게 당연했습니다.”
사실 애국심이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럴 때 정석적이고 적당한 대답이었다. 왕비도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왕비는 헨리 왕을 도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것에 관해서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라에 대한 애착도 조금 있는 편이었고.
“공작 부인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군요. 자, 제가 너무 말이 많았나 봅니다. 지루하겠어요. 시녀장?”
“네, 왕비 전하.”
시녀장이 손짓하자 시녀들이 새로운 다과를 테이블에 올렸다. 다과를 먹으며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는 거였다. 오늘은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쉴 틈이 없이 바빴다.
왕비가 내게 여러 호의를 표했으니 그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은 귀부인들이 몰려든 것이다. 내게 한 마디라도 걸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이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할 지경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에게 절친한 친구가 있다고 들었어요. 인체스터의 크리스티나라고 했나. 다음에는 크리스티나 영애도 함께 오면 좋겠군요.”
그 말이 결정타였다.
나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왕비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이들이 나를 맛있는 고기처럼 보고 달려든 것이다.
오늘 모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왕비가 상황을 잘 이용할 줄 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비는 내게 관심을 둠으로 인해서 틸리언즈를 비호했다. 그간 안주인이 없어서 사교 모임에서는 도태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근 한 달간은 초대장이 끊이지 않으리라.
틸리언즈는 본디 왕가를 수호하는 가문이었으니 이대로 외면당하게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똑똑하다는 거 맞네.
* * *
왕비는 내가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나는 그래서 난데없는 사업 발표회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덕분에 고객층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사람들이 아직 시작도 못 한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왕비의 모임 다음 날 바로 클로린, 웨스턴과의 약속이 있었다. 그들에게 왕비의 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니 아주 즐거워했다.
“벌써 성공한 느낌이군요!”
“이대로라면 에르긴 백작을 누르는 것은 물론이고 대단한 사업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 듯해요.”
희망찬 얼굴로 꿈을 늘어놓는 그들 덕에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성공해야만 하네. 여기서 나온 수익으로 리엔스터 백작 부인께 은혜를 갚기로 한 일을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요! 말씀 주신 건 이미 알아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많으니까요.”
“잘해 줄 거라고 믿네. 요새 에르긴의 동향은 어떻지? 사업적으로 말이야.”
“여전히 찾는 이들은 많이 찾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이렇다 할 살롱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희를 의식했는지 백작의 살롱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서비스?”
“일 대 일 서비스라고 하던데 고객을 말대로 일 대 일로 접대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인력 소모가 심할 거야.”
“그래서 좀 더 고급화 전략으로 바꿔서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역시, 에르긴.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