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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53화 (53/92)

53화

귀족들이 좋아하는 건 ‘특별함’이다. 돈을 쓴 만큼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 에르긴은 그 니즈를 만족시킬 줄 알았다.

“지금은 활개를 치게 두게.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우리를 뛰어넘지는 못할 테니.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역시 돈 아니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부인의 사업을 따라잡진 못할 겁니다.”

예약제인 것은 물론 쓰는 돈에 따라서 차별화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호캉스라니. 그리고 최고층에는 라운지를 둘 생각이었다. 달마다 많은 돈을 쓴 이들만 초대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모든 게 다 최고급이어야 해.”

“예, 공작 부인!”

그리고 쓴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 * *

아침부터 찾아왔던 클로린과 웨스턴이 돌아가자마자 데이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응접실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데이지의 손에는 노란색 머리띠가 들려 있었다.

“데이지?”

“미엘린, 바빠요?”

꾸물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던 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내가 바쁠까 봐. 데이지를 손짓해서 부르니 금세 풀려서는 쪼르르 쫓아왔다. 내 팔을 끌어안은 데이지가 부스스 웃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머리띠를 해 주었다.

“아침은?”

“먹었어요. 약속한 대로 당근이랑 브로콜리도 먹었어요! 그렇지, 엔시?”

“네. 아주 콩알만큼이긴 하지만 드시긴 했죠.”

“으……. 콩알만큼 아니야! 엄청 많이 먹었어!”

“네, 그럴지도 모르고요.”

엔시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표정으로 보건대, 데이지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이지가 분하다는 듯이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미엘린!”

“물론 나는 데이지의 말을 믿어. 그리고 내일도 브로콜리와 당근을 남기지 않을 거야. 그렇지?”

“……네.”

“좋아. 그러면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네.”

“정말요?”

“그래. 쿠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니?”

“네!”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데이지는 귀족 가의 아이로 태어나 음식을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접해 보게 된 것이다.

그게 아이에게 있어서는 신기하고 재밌는 일일 수 있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준다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모두가 맛있다고 칭찬했으니 말이다. 데이지는 몇 번이나 내게 졸랐다. 샌드위치를 다시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샌드위치만 만들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다른 제안을 했다. 쿠키를 만들자고 말이다.

다만, 단것만 잔뜩 먹으면 식사를 안 할 수도 있으니 조건을 걸었다. 데이지가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를 잘 먹는다면 만들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결국, 데이지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케일린도 오늘 온다고 했지?”

“네, 미엘린!”

“좋아. 오늘 숙제도 다 했고?”

“네!”

데이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별이라도 담아 둔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심술이 일었다.

“할까?”

“네!”

“말까?”

“……미엘리인…….”

데이지가 울먹이는 눈으로 내 팔을 끌어안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데이지 하는 짓이 참 귀엽단 말이야.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무슨 교습 있는 날이더라?”

“오늘 역사 교습이요!”

해 주겠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 내 주변을 데이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좋아. 그러면 교습받고 나오면 준비를 해 둘게. 어때?”

“좋아요!”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실 이미 준비를 다 해 두었다는 것은 비밀이다. 로시에가 나를 못 말린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미 케일린에게도 자랑했어요! 오늘 쿠키 만들 거라고. 전에 저택에서 야영한 것도 자랑했고…….”

“그리고?”

“소풍 다시 가기로 한 것도 자랑했고…….”

데이지가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는지 손가락을 하나, 하나 꼽았다.

“잘했네. 그거 다 하고 나면 뭘 할지 또 생각해 보자.”

“네!”

데이지가 배시시 웃었다.

“미엘린.”

“음?”

“좋아해요.”

데이지가 머리 위로 동그란 원을 그렸다.

“이만큼!”

“너무 작은데?”

“그럼 이이이이, 만큼!”

데이지가 까치발을 하고 서서 팔을 쭉 뻗었다. 그런 데이지의 뺨에 나도 모르게 뽀뽀했다. 데이지가 볼을 움켜쥐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데이지.”

* * *

데이지는 나와 시간을 보내고 나와 점심까지 먹은 후에야 교습을 받으러 갔다. 절대로 어디 가지 않고 데이지를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받아 낸 이후였다.

집무실에서 사업에 대한 걸 살펴보고 있는데 하녀장이 날 찾아왔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말이다. 하녀장이 몇 번이나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꺼냈다.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공작 부인.”

“음?”

“데이지 아가씨요.”

하녀장이 또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쏟아 냈다. 눈물을 애써 손수건으로 닦으며 하녀장이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데이지 아가씨가 얼마나 상심이 크셨는지 몰라요. 케일린 아가씨는 뭘 했더라, 뭘 했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듣는 저희로서는 가슴이 찢어지더라고요.”

“고생이 많았네.”

“아니요. 고생이랄 건 아니었지만, 그랬던 아가씨가 저렇게 밝은 얼굴을 하시는 걸 보니…….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나도 좋아서 하는 일에 이렇게 공치사까지 받으니 얼굴이 붉어졌다. 괜히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뒤적거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녀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께서는 끝까지 데이지 아가씨 걱정만 하셨어요. 제 손을 잡고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죠.”

하녀장의 손수건이 물기로 흥건해지는 게 보인다.

“그래서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공작 부인께서 데이지 아가씨를 가엽게 여겨 주시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네. 데이지를 아껴 줘서 고마울 뿐이지.”

“……정말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앞으로도 성심을 다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그렇게 눈물의 고해를 마친 하녀장이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게 끝인 줄 알았다.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듯 그다음에는 집사장이 찾아온 것이다.

뭔가 멋쩍은 듯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지만 아무런 용건도 없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로시에가 있는데 집사장이 굳이 왜……?

“커흠. 앉아도 될까요?”

“그러시게.”

내 긍정에 집사장이 하녀장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공작 부인.”

고개를 끄덕이니 집사장이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공작 부인을 오해했습니다.”

“무슨 오해?”

“전에 결혼하셨던 분이다 보니 공작님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요.”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아이반은 초혼이고 나는 재혼이었던 데다가 에르긴과 좋지 않은 이유로 이혼을 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귀족 세계는 폐쇄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시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 저택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해한다.

“그런데…… 제가 모시게 된 공작 부인은 그렇게 재단할 분이 아니셨습니다.”

“큼.”

“도량도 넓고 생각도 깊으시지요. 그리고 영민하시니 공작 가를 이끌어 나가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모두 불민한 제 오해였던 것이지요.”

“집사장…….”

아이 참. 오늘 다들 왜 이래?

볼을 붉힌 채로 서류를 팔락거렸다. 이런 칭찬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전부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아. 이건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타르트라고 합니다. 맛이 달콤하니 괜찮더군요.”

“맛있게 먹겠네.”

집사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은 로시에였다.

“……로시에 너도?”

“아니요.”

로시에가 고개를 저었다.

“후우…….”

긴장이 풀려서는 늘어졌다. 가만히 앉아서 칭찬만 듣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대체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새삼스럽게.”

로시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곧 공작 부인 생신이시니 그러는 거 아닐까요?”

“아.”

내 생일이 이즈음이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로시에가 그것도 몰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바쁘시긴 하셨나 봐요. 생신도 잊으시고.”

“그거야, 뭐.”

“그래서 생신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으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닐까요?”

“별로. 정말 괜찮은데.”

“부인께서 덤덤하시니, 다들 더 그러는 거예요.”

“그런가……. 아, 쿠키 만들 준비는 다 했어? 주방장에게 매일 신세를 져서 어쩌나.”

“기쁜 마음으로 돕겠다고 하던걸요. 데이지 아가씨 웃는 얼굴이 모두의 기쁨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나저나 생일이라.

본디 내 생일이 아니라 미엘린의 생일이었다. 어차피 내 생일을 기억해 주는 이도 없는데 이제 와 그런 걸 따질 생각도 없었다. 미엘린의 생일을 내 생일이라고 치지, 뭐.

마지막 생일은 정신없이 보냈던 기억이 있었다. 이혼을 앞두고 있어서 생일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전 생일은…… 김태진과 보냈던 기억은 아예 지워 버리고 싶었다.

이번 생일은 어떠려나.

기대를 않아야 실망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미약한 기대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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