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스타티스. 뭐가 좋을까?”
“공작 부인의 생신 선물 말씀이십니까?”
“그래. 좋은 생각 없나?”
“글쎼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그렇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티스가 데이트를 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겨졌다.
“그 반응은 무엇입니까?”
“아니네.”
“……저는 그저 바빠서 결혼을 안 할 뿐입니다. 바빠서!”
“누가 뭐라고 했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미엘린의 선물을 고르는 거야. 벌써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네.”
“어제까지만 해도 모르셨지 않습니까.”
“그건…….”
아이반이 반성하는 얼굴을 했다. 스타티스의 말대로 여태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스타티스가 호적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서류를 살펴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스타티스로부터 시작된 말은 저택에 전부 퍼져나갔다. 지금 사용인들조차 선물을 놓고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진 않을지라도 처음 결혼해서 온 공작 부인에게 다들 무언가를 주고 싶어 했다.
“흐음…….”
아이반이 머리를 짚었다. 그간 용병 기사로 떠돌면서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으니 선물에 대한 건 문외한에 가까웠다. 게다가 미엘린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이다 보니 가지지 못한 것도 없었다.
그런 미엘린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이반이 생각에 잠겼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미엘린이 가장 좋아할 것은 아무래도 에르긴 백작이 망하는 것일 테다. 그건 차차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과거 왕들이 내린 작위를 마구잡이로 거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뭐가 좋을까.’
아이반이 고민에 빠졌다.
“성대한 연회를 여는 건?”
그간 미엘린의 행적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을 듯했다. 미엘린은 성대한 연회를 열기보다 소소하게 모여서 식사를 하는 일을 더 좋아할 것 같았다.
데이지와 어울려서 벽난로에 감자를 구워 먹던 미엘린을 떠올리면 더욱더 그랬다.
스타티스도 아는 걸 아이반이 모를 리 없었다.
“흠. 역시 그건 아니지?”
“예, 공작님.”
아이반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을 맞부딪혔다.
“그래! 특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게 좋겠군.”
“특별한이라고 하시면…….”
“숲의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내부 단장이 끝났다고 들었네.”
“그건 공작 부인이 직접 준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미엘린이 요리를 하진 않지.”
“예?”
스타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내게 숨겨진 과거가 있지 않나.”
“용병 기사로 일하신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덕에 안 해 본 일이 없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길에서 야영하면서 제대로 챙겨 먹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예전에 여관에 머물면서 요리를 배운 적이 있었네.”
“그런 투박한 음식을 좋아하실…… 좋아하실 것 같군요.”
“그러면 생일 당일은 그렇게 보내도록 하지.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연회를 열어야 하지 않나.”
“공작 부인의 위신에 맞도록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리스티나 영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요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영애의 도움을 얻어서 미엘린의 취향에 맞춰 꾸밀 수 있으면 좋겠군. 당사자에게 준비하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예, 공작님.”
아이반이 턱을 쓸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할 생각을 하니 조금 떨리는 것 같다. 미엘린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그가 할 수 있은 음식들은 대부분 길에서 먹을 수 있도록 조리법이 쉬운 것들이었지만 맛은 보장할 수 있었다.
아이반이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로 양피지를 가득 채웠다.
“이걸 준비해 줄 수 있겠나?”
“네, 공작님.”
“그리고…… 어머니가 남기신 목걸이를 선물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가문에 전해지는 보석들은 대부분 힐리아가 물려받았다. 그것들이 힐리아가 죽고 나서 전부 저택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제 새로운 주인을 찾을 때가 된 것 같았다.
“……공작 부인께서 받아 주신다면 기쁠 것 같군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네.”
아이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문에 전해져 오는 보석이 가지는 의미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보석이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고위 가문에서 소유했던 보석들은 특히 비싼 값에 팔려 나가곤 했다.
본디 선대 공작 부인이 해야 하는 일을 아이반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늦어진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다. 아이반이 완전히 보석에 대해서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날,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공작님.”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네.”
아이반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미엘린의 생일 계획이 준비되었다.
* * *
“꺄아! 그러지 마아!”
데이지에게 케일린이 의도적으로 반죽을 튀겼다. 두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데이지가 동글동글하게 반죽을 빚으면 케일린이 거기에 초콜릿을 박았다.
생김새는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맛은 있을 거였다.
“그건 너무 크지 않아?”
“그런가요?”
케일린이 새침하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반죽을 떼어 냈다.
“네 얼굴보다 크면 먹기 힘들지 않을까?”
“맞는 말이네요. 이 정도면 되겠죠, 공작 부인?”
“충분한 것 같구나.”
케일린이 방긋 웃었다.
“엄마도 주고 아빠도 주고…… 오빠들도 줄 거예요.”
“좋은 생각이야.”
“조카도 줄 거예요.”
케일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반죽을 꾹꾹 눌렀다. 데이지가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숙부님이랑 미엘린이랑 스타티스랑…… 엔시랑, 로시에도 줄 거야!”
“그래, 다들 기뻐하겠구나.”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엘린도 기뻐요?”
“그럼. 나도 원래 쿠키를 엄청 좋아하거든.”
데이지와 케일린은 불이 붙어서 쿠키를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후작 부부는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그저 특이하다고는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귀족들이 누가 이런 걸 하겠는가. 그럼에도 후작 부부는 케일린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좋은 사람들이지.
게다가 편협하지 않고.
쿠키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한 아이들이 짧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로시에와 엔시가 한 명씩 안아 데이지의 침실에 눕혔다. 그러는 사이에 주방장이 쿠키들을 가져다가 오븐에 넣었다.
“주방장. 아이들이 일어날 때쯤에는 쿠키가 완성되겠지?”
“예,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잘됐군.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공작 부인!”
주방장이 손을 내저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혹시…… 선호하는 음식이나 디저트, 케이크가 있으십니까?”
주방장이 떨리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로시에는 아직 파악이 안 됐다고 하더군요.”
“내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서 그렇다네.”
“그래도 좀 더 선호하시는 음식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꼭 드시고 싶은 음식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거라고는 순댓국과 콩나물 해장국, 김치찌개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진성 한국인이기는 한 모양이지. 그러나, 이런 곳에서 그런 걸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먹을 거 가지고 투정 부리면 안 되는 법이지.
그래도 굳이 말해야 하는 거라면…….
“얼큰한 스튜를 먹고 싶군.”
“그리고 또요?”
“또? 음……. 그래, 얼큰한 파스타가 먹고 싶군.”
“또 드시고 싶으신 건…….”
“그렇다면 고기를 썰어 넣어서 끓인 얼큰한 국물 요리가 먹고 싶군.”
결국, 얼큰한 게 먹고 싶다는 거였다.
생각해 보니 여기에 와서는 느끼한 음식 위주로 먹었다. 얼큰한 음식은 거의 접하지 못했다. 하긴. 고춧가루보다는 치즈와 버터를 많이 쓰는 음식들이니.
내 말에 주방장이 아주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내 식단에 반영하려는 눈치 같았다.
“감사합니다, 부인!”
“별말씀을.”
“하녀장님.”
“알아냈는가?”
그림자에 숨어서 은밀하게 서 있던 하녀장이 엄숙하게 물었다.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에게는 막중한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드시고 싶어 하신다고?”
“얼큰한 스튜, 얼큰한 고깃국물 요리, 그리고 얼큰한 파스타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매운 걸 좋아하셨나. 일단 알았네. 그대로 공작님께 전해 드리도록 하지.”
“예. 하녀장님.”
미엘린이 선호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 오라고 아이반이 시켰던 것이다. 별장에서의 하룻밤을 몰래 기획하고 있는 거였다. 데이지에게도 의도치 않게 서프라이즈 선물이 되게 생겼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은밀했다.
식자재를 공수하는 것까지.
그래도 주방장의 협조로 차곡차곡 준비가 잘되어 가고 있었다. 아주, 유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