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생일 당일이 밝았다. 사실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는데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은 로시에가 호들갑을 떨면서 하루, 하루 말해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저녁 데이지, 아이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크리스티나를 필두로 해서 사람들이 준비한 생일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대놓고 편지를 보내 왔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있으면 지금 말해.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준비해 보려고.]
처음 받았을 땐 ‘협박인가……?’ 했다. 알고 보니 그동안 나와 크리스티나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서로 생일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티나도 내 생일을 챙기지 못했던 거고. 급박하게 생일 선물을 준비하려다 보니 마음이 급한 듯했다. 그러나 필요한 거라니.
지금 내가 필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애초에 로시에가 내게 결핍이 생기게 두고 보질 않았다.
모든 것이 넘치도록 많았다.
그나마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핸드폰……? 조금 답답한 건 있었다. 첨단 IT 시대에서 살다 온 내가 이런 불모지에서 살게 되다니. 있다가 없으니 가끔 미칠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핸드폰을 찾는다는 건 미친 짓 아니겠는가. 핸드폰이라고 하면 새로 발견된 짐승이라고 생각하거나 과일 이름이라고 생각하거나 하겠지.
나는 아무거나 괜찮다고 대답했다. 길에 자라는 풀 한 포기라도 괜찮다고. 크리스티나는 탐탁지 않은 답변을 보내 왔다.
[내가 알아서 해 볼게.]
아무튼.
주변에서 그렇게 난리를 피우다 보니 내가 생일을 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른 아침부터 로시에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공작 부인!”
“알았어, 알았어.”
“이 세 가지 드레스 중에서 골라 주세요.”
“……아무거나. 셋 다 비슷하지 않아?”
“레이스 문양이 달라요!”
그렇구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니 보이는 정도였다.
“왜 네가 더 신난 거 같지?”
“저뿐만이 아닌걸요? 지금 저택에 거주하는 모두가 신이 나 있다고요?”
“왜……?”
“공작 부인의 생신이니까요! 다들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던데 꼭 받아 주셔야 해요! 특히 제 것도요!”
로시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약속할게.”
로시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옷을 갈아입혀 주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드레스가 워낙 복잡한 옷이라 혼자 못 입는다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덤덤한 것은 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일인데 말이다.
“정말로 생신 축하드려요, 공작 부인!”
“고마워.”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로시에가 내민 봉투의 리본을 푸니 작고 귀여운 나무 인형이 나왔다.
“행운을 빌어 주는 거래요. 제 남동생이 직접 만들어 준 건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로시에가 긴장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행운을 빌어 주는 인형이라. 의미를 고심하고 직접 만들기까지. 그사이에 들어간 정성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고마워, 로시에. 화장대에 놓으면 되겠다.”
“정말요?”
“그럼.”
“와아! 정말 영광이에요. 제프리도 좋아할 거예요.”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이 정도일 거라고.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 부인, 생신 축하드려요! 이건 별건 아니지만…… 몸에 좋은 약초래요.”
“공작 부인, 오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이건 작은 선물이에요.”
“이것도요!”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선물 세례가 쏟아진 것이다. 로시에는 그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결국, 내 목적지였던 다이닝룸에 도착했을 때는 온갖 물건들이 품에 가득 안겨 있었다.
눈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미엘린?”
“……아이반.”
“그게 다 뭔가요?”
“생일 선물이요.”
“조금 도와드릴까요?”
“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뿐만 아니라 로시에도 품 안 가득 물건을 안고 있어서 도와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이반이 선물을 반절 정도 덜자 시야가 탁 트였다.
“와, 아이반. 좋은 아침이에요.”
뒤늦은 내 인사에 아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요. 좋은 아침이에요, 미엘린. 데이지는 아직인가요?”
“데이지는 9시가 되어야 일어나니까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뭐 할지 정말로 말 안 해 줄 건가요?”
“데이지와 제 비밀입니다.”
아이반이 눈을 찡긋했다. 오늘 저녁까지는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생일 축하합니다, 미엘린.”
“어제 새벽에도 들었어요.”
“못 들은 줄 알았어요.”
“못 듣다니요?”
아이반이 눈가를 접으며 야살스레 웃었다. 내가 생각건대, 이 남자, 구미호인 게 틀림없다. 진짜로. 내가 새벽에 아이반 덕택에 정신이 없어서 못 들은 게 아니냐는 은밀한 질문이었다.
물론, 정신이 없기는 했다.
속된 말로 홍콩 간다는 게 무엇인지 체감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래도 들을 건 들었단 말이다.
이를 갈면서 아이반에게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들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제 노력이 부족했나 봅니다.”
“무슨……?”
어처구니가 없어서 골이 띵한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노력이 부족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말해 봤자 말려들 것 같아서 고개를 내젓고는 자리에 앉았다.
집사장이 친절하게 트레이를 가져다가 선물을 침실로 옮겨 주었다. 그 덕에 아침 식사는 빈손으로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에르긴과 가이스가 복지 사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하던데요.”
“저도 들었습니다, 미엘린. 가정복지부에서 이번 사업의 제안서를 검토하게 될 것 같습니다.”
“흐음. 리엔스터 백작 부인 성품에 그런 제안서를 통과시킬 리 없을 텐데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그들의 수작을 못 알아보실 리 없잖아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그 제안서가 통과하지 않으면 좋은 것 아닙니까?”
음식을 씹어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는 바르고 곧은 방법으로만 생각했을 때 그런 거였다. 굳이 에르긴이 돈을 투자해서 사업을 한다는 데 말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복지 사업을 말이다.
나중에 누군가의 몫으로 돌리면 되는 것 아닌가.
“복지 사업을 시작하는 데는 초기 자본이 많이 들 거예요. 아무리 가정복지부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면 에르긴이 그대로 하게 두는 건 어떨까요? 나중에 가정복지부에서 압류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새로운 사업의 주인을 찾아주는 거죠.”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제가 잔머리는 잘 굴러가거든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편지를 쓰는 게 좋을까요?”
“예. 저보다는 미엘린의 말을 더 신뢰하실 것 같군요.”
아이반이 설핏 미소 지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대신 우리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최대한 침실로는 끌어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아. 그리고 에르긴 백작에게 제안할 유령 사업도 얼추 준비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스타티스가 고생했겠군요.”
“아무래도 그랬지요. 사업안도 적당하게 구상했으니 드래곤 클럽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말 잘하는 사기꾼으로 고른 것 맞죠?”
“헨리가 사기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기꾼의 신병을 제게 넘겼습니다.”
“그자는 믿을 만한가요? 배신을 할 수도 있는걸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 대신 형을 삭감해 주고 그의 가족을 부양해 주기로 했으니까요.”
“그러면 준비가 거의 끝난 게 맞네요.”
아이반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에까지 신경 쓸 틈이 없어서 아이반에게 일임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잘 준비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변만 화려해서는 속이기 힘들 테니 지금은 예절 교육을 받는 중입니다.”
사기꾼이 예절 교육이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확실히 제대로 된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 맞았다.
“이번 수업이 끝나면 교양 수업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너무 늦지 않겠어요?”
“아니요. 이번 주면 준비가 끝납니다.”
아이반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사기꾼에게 자비로울 필요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