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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57화 (57/92)

57화

아무래도 스파르타식 주입 교육을 받는 모양이었다. 하긴, 말대로 급하기도 하겠지만 사기꾼의 사정까지 봐주면서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다음 주 중에는 크로세타 백작과 접선할 수 있을 겁니다.”

“잘됐네요.”

드디어 에르긴을 떼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도는 에르긴과 크로세타 핏줄들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여전히 내 이름을 대고 쇼핑을 하려고 드는 대부인이나, 내 뒤를 쫓는 에르긴.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끝까지 이렇게 지저분하게 군다면 나 또한 그렇게 대해 줄 생각이었다.

“빨리 서둘렀으면 좋겠어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늘 오후 5시에 준비하고 1층 홀로 나오면 됩니다.”

“무슨 준비요?”

“준비는 로시에가 알아서 해 줄 겁니다. 미엘린은 몸만 나오면 돼요.”

“그렇군요?”

결국, 나 빼고 공범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은 외톨이였다. 작은 기대감이 일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 * *

오후 5시가 되기 무섭게 데이지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미엘린…….”

“데이지?”

“생일 축하해요.”

데이지가 몸을 비비 꼬면서 말했다. 데이지가 내게 선물로 준 것은 작은 별로 가득 찬 유리병이었다.

“미엘린이 그랬잖아요. 별을 1,000개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케일린이랑 엔시랑 열심히 접었어요. 데이지는 아직 어려서 못하지만, 별이 소원을 들어줄 거예요.”

하.

내 소원을 이뤄 주고 싶어서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별을 접고 있었다는 거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의 마음만큼이나 반짝이는 별이었다.

“고마워, 데이지. 그리고 엔시도. 케일린도.”

데이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소원을 빌어요, 미엘린!”

유리병을 끌어안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지금 내가 소원으로 빌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물질적으로만 풍요로운 게 아니었다. 나는 감정적으로도 부족한 게 없었다.

텅 비어 있던 곳을 아이반과 데이지가 채워 준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말이다. 난 더 이상 불행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요즘 같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랄 것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요즘처럼 모두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

소원을 빌고 눈을 찔끔 뜨자 나처럼 눈을 꾹 감고 있는 데이지가 보였다.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데이지도 소원 빌어 봐.”

내 말에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음…… 음……. 데이지랑 미엘린이랑 숙부님이랑 평생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아무도 안 아프게 해 주시고……. 어, 음. 그거면 될 것 같아요!”

데이지가 비는 소원을 듣고 있던 하녀들이 미소 지었다.

데이지가 눈을 힐끗 떴다. 나도 모르게 데이지를 꼭 끌어안고 빙글 돌았다.

“으이구, 우리 똥강아지!”

“으응?”

데이지가 내 품에 파고들어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사소한 몸짓조차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내 곁에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우리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데이지. 데이지가 이렇게 별을 접어 줬으니까 말이야.”

“정말요?”

“그럼!”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겠네요?”

“그렇지!”

데이지가 내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인제 그만 가셔야 해요. 대공 전하 혼자 오래 기다리시겠어요.”

“가자.”

“네!”

데이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대체 어디를 가길래 이렇게 꼭꼭 숨기는 건지. 데이지의 작은 손을 붙들고 1층으로 내려가니 나처럼 편한 옷차림을 한 아이반이 보였다.

“아이반?”

그리고 아이반의 손에는 단출한 짐가방이 들려 있었다.

“대체 어딜 가길래…….”

“마차를 타고서는 못 가는 곳입니다. 데이지, 걷다가 힘들면 말해 줘야 해.”

“네, 숙부님!”

데이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꽤 걸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갈 만한 곳이 이 주변에 있다면…….

“스테릴 숲 별장에 가는 건가요?”

“……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려고 합니다.”

“어떻게 알긴요. 이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야 한정되어 있잖아요? 와. 안 그래도 가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오늘 그곳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 겁니다.”

“그래도 돼요? 내일 아침 일정은 없나요?”

“그런 걱정은 내려놓고 가는 겁니다.”

아이반이 장난스럽게 웃고는 내 손을 잡았다. 스테릴 숲에 들어오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스테릴 숲은 마치 요정들이 사는 것처럼 몽환적이고 반짝거리는 곳이었다.

나뭇잎들끼리 부딪혀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요정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별장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게다가 데이지도 힘들지 않은지 오히려 신이 나서는 뛰었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눈치였다.

“이건 뭐예요? 저건 또 뭐예요?”

자꾸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묻는데 사실 숲에 사는 식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나와 아이반도 마찬가지였다.

“데이지.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을 가져오는 건 어때?”

“식물도감이요?”

“책을 가져와서 데이지가 궁금한 식물을 책에서 찾아보는 거지. 그러면 훨씬 더 재밌을 거야.”

“우와! 좋아요! 그러면 숲에 다시 오는 건가요?”

“약속할게.”

데이지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저녁노을이 내려앉은 데이지의 금발이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이 데이지를 좀 더 활달하게 보이게 했다.

“너무 좋아요!”

“……정말 신기하군요.”

아이반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가요?”

“데이지를 어쩜 그렇게 잘 다루는 겁니까?”

수직 구조로 이루어진 회사에서 최하위층으로 일하다 보면 웬만한 일은 다 잘하게 되어 있었다. 골을 부리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전부 우리 몫이었다.

그나마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가면 나아지나 했더니만.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해서 어디든지 톡 튀어나온 못 같은 사람은 있었다.

그런 이들에 비해서 데이지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운가. 데이지를 다루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음. 그건 비밀이에요.”

“네?”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돌렸다.

“저기에 별장이 보이네요! 도착했나 봐요. 배가 고픈데 생일 저녁을 굶게 할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별장 안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체 뭘 준비해 뒀을까.

궁금한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나보다 신난 것으로 추측되는 데이지가 우리 손을 잡아당겼다.

“얼른요!”

데이지에게 이끌려서 별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정갈하게 정돈된 내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벽난로에는 이미 피워 둔 것으로 보이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별장이라서 그런지 한눈에 모든 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우와!”

나보다 신난 게 분명한 데이지가 뽀르르 뛰어 들어갔다.

“미엘린! 얼른 들어와요!”

데이지가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 뒤를 아이반이 따라 들어왔는데 그도 꽤 여기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벽난로 앞에는 러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담요와 쿠션이 쌓여 있었다.

데이지가 그것을 선물 상자처럼 풀어 헤쳤다.

“우와!”

담요와 쿠션에 파묻혀서 데이지가 탄성을 터뜨렸다. 별것 아닌데도 모든 게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다. 데이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이끌려서 데이지 옆에 앉았다.

데이지가 강아지처럼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쓰다듬고 있자니 이게 행복이지, 뭐. 다른 게 행복인가 싶었다.

“식사 준비를 할 테니 쉬고 있어요.”

“식사 준비요? 아이반이?”

설마, 너 요리도 하니?

그런 눈빛으로 아이반을 쳐다보았다. 요새 로판 남자주인공 덕목에 요리도 있었나. 대체 쟤가 못하는 건 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용병 기사로 일하면서 배운 게 있어서요.”

“아하…….”

“조금 투박하긴 하지만 맛은 괜찮거든요. 혹시 안 먹는 음식이 있다면…….”

“아니요. 뭐든 괜찮아요.”

아이반이 주방으로 향했다. 앞치마를 매는 뒷모습이 참 섹시하다. 무엇이든 완벽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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