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에르긴이 진열된 보석을 쓱 훑어보았다.
“무엇을 사려고 하십니까?”
보석상 점주가 친절하게 물었다.
“아내 선물을 사려고 하오.”
미엘린의 생일이었다.
원래 미엘린의 생일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하고 선물을 주곤 했었다. 미엘린은 유독 에메랄드가 들어간 보석류를 좋아했다.
눈동자 색과 비슷하다나.
“에메랄드가 박힌 것으로 보여 주시오. 가장 좋은 물건으로.”
에르긴의 말에 점주가 여러 가지 보석을 꺼내 놓았다. 에메랄드로 장식한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반지와 팔찌 같은 것들이었다. 에르긴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이걸로 하지. 포장을 잘 해 주시오.”
“예, 백작님.”
에르긴이 값을 치르고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이 정도 선물이면 미엘린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면 미엘린도 제 마음을 일부 알아줄 것이다.
“후우.”
“어디로 갈까요?”
마부가 에르긴에게 물었다.
미엘린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에르긴이 공작 저로 찾아간다고 해서 미엘린이 만나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에르긴이 한 실수 덕분에 미엘린의 분노가 극에 달하지 않았던가.
법정 앞에서는 정말로 실수였다.
그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저지른 실수. 세리나 따위를 가지게 되느니 미엘린을 그 자리에서 취해 버리고 싶었다. 그것 또한 미엘린을 향한 사랑일 것이다. 미엘린이 지금 아이반이 가진 것들에 눈이 멀어 에르긴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
에르긴이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가서 집사장을 통해서 정식으로 미엘린 앞으로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귀물이다 보니 다른 심부름꾼의 손을 타게 하기가 꺼림칙했다.
“예, 백작님.”
에르긴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에르긴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미엘린에게 편지를 썼다.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을 적은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와 함께 목걸이를 보냈다.
‘외출이라도 하면 만나러 가겠는데.’
아무래도 공작 가의 높은 담은 넘을 수가 없으니 문제였다. 아이반이 미엘린을 가둬 두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에르긴이 혀를 내둘렀다.
분명 미엘린이라면 아이반과 밤을 보냈을 리 없었다. 미엘린이 에르긴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그렇게 쉽게 다른 남자에게 침실 옆자리를 내주겠는가. 미엘린의 침실은 에르긴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 아이반이 미엘린을 가둬 두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3개월 후면 신전에서 조사도 나올 테니 말이다.
에르긴이 그럴 줄 알았고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목걸이를 보고 기분이 풀린 미엘린이 연락하면 바로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부부간의 불화도 계기가 있다면 금방 누그러지기 마련이었다.
에르긴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 * *
매콤하고 얼큰한 것.
주방장을 통해서 아이반이 알아낸 미엘린의 취향이었다. 자연스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행히 주방장은 아이반의 뜻을 잘 이해해 주었다.
그저 자신이 궁금한 것처럼 미엘린에게 물어서 그녀의 취향을 알아 온 것이다. 아이반이 매운맛을 내는 향신료를 과감하게 사용했다. 사실 길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맛을 내야 하니 가지고 다니기 쉬운 향신료를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미엘린이 먹고 싶어 한다던 매운 음식들은 아이반이 자신 있게 하는 축에 속했다.
아무래도 데이지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될 예정이라 아이가 먹을 건 따로 준비해야 했다.
아이반이 오랜만에 하는 요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도와줄 것 없어요?”
매콤한 냄새에 이끌려 주방으로 들어온 미엘린이 물었다. 그간 굶주려 있었던 캡사이신의 향기였다.
“괜찮습니다. 데이지와 함께 쉬고 있으면 됩니다.”
“데이지는 책을 읽고 있어요. 스스로 읽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미엘린이 아이반의 옆에 가서 섰다. 아이반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길에서 먹는 음식들은 맛을 내기 위해서 향신료를 강하게 쓰곤 합니다. 여관에서 배웠던 매운 감자 스튜와 매운 고기찜을 하려고 합니다.”
“오!”
“생일에 먹기에 조금 조촐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한데…….”
“아이반. 음식은 맛있으면 되는 거예요. 조촐하고 성대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미엘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지금 아이반이 고른 메뉴들은 미엘린의 입맛을 자극하는 것들뿐이었다. 그간 바랐던 얼큰하고 칼칼한 음식들을 드디어 영접하게 되는 것 아닌가!
미엘린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아이반의 손끝을 응시했다. 칼이 춤추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사실은 요리사의 칼이라기보다는 기사의 검에 가까웠지만 썰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미엘린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냄새가 정말 맛있게 나요. 으. 매콤한 게 정말 먹고 싶었는데.”
미엘린이 배시시 웃었다.
“맛도 미엘린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냄새부터 합격이에요, 아이반. 진심으로.”
미엘린이 생긋 미소 지었다. 정말로 이런 냄새를 가진 음식이라면 독극물만 아니면 삼킬 수 있었다. 매운맛에 길든 한국인이 얼마나 굶주렸겠는가. 가끔 나오는 맵다는 음식도 미엘린의 입맛엔 싱겁기만 했다.
“……큼. 한 번 간을 보겠습니까?”
“좋아요!”
미엘린이 냉큼 수저를 들었다. 아이반이 스튜 국물을 덜어 미엘린에게 내밀었다. 미엘린이 붉은 국물을 증발시킬 것처럼 강렬한 눈으로 응시했다.
눈으로만 음미하던 것을 한 모금 마셨다.
“으아……!”
익숙하지 못한 혀가 바르르 발작을 일으켰지만, 미엘린의 영혼은 전율했다. 이게 얼마 만인가! 미엘린이 붉은 얼굴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정말 맛있어요! 이 맛이에요!”
“미엘린! 얼굴이 많이 붉습니다! 매운 건 아무래도…….”
“매운 건 이렇게 먹는 거죠, 원래. 스읍…….”
미엘린이 물을 들이붓듯이 마셨다. 그럼에도 속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엘린…….”
“정말 맛있어요, 아이반. 이대로 하는 거예요! 최고의 생일 선물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조금 식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뜨거워서 그래요, 뜨거워서.”
미엘린인 눈가를 콕콕 닦아 냈다.
절대로 매워서 그런 게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 * *
아이반이 차려 준 저녁 식사는 정말로 완벽했다. 정말로. 감자찌개를 먹는 것 같은 얼큰함이 분명 있었다. 거기에 하얀 쌀밥이라니. 아이반이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몰라도 정말 제대로 배웠다.
“안 돼, 데이지. 이건 맵단다.”
아이반이 매운 스튜 그릇을 넘보는 데이지를 막았다.
“우웅……. 먹어 보고 싶은데.”
“좋아, 데이지. 그러면 아주 조금만 먹어 보는 거야. 그래도 괜찮으면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데이지가 용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못하게 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 오히려 왜 안 되는지 온몸으로 체득하게 해 주는 게 더 빠른 방법이었다.
아이반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가운데 데이지의 수저 밑부분을 아주 살짝 국물에 적셔 주었다. 데이지가 기대감에 가득한 얼굴로 수저를 물었다.
“어때. 괜찮니?”
데이지가 빠르게 수저를 뱉어 냈다.
“으으으으! 혀가 아파요!”
울상으로 외치는 데이지에게 달디단 푸딩을 한 입 쏙 넣어 주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파닥이던 것을 멈췄다. 또랑또랑한 눈동자에 고인 눈물도 쓱 닦아 냈다. 붉어진 볼을 토닥여 주니 데이지가 배시시 웃었다.
“어때. 먹을 수 있겠어?”
“아니요.”
“왜 숙부님이 안 된다고 했는지 알겠니?”
“네.”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중에 크면 먹을 수 있을까요?”
“열심히 노력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데이지. 데이지는 데이지에게 맞는 음식을 먹으면 된단다.”
“맛있어 보였어요.”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방금처럼 탈이 날 수도 있어. 배가 아플 수도 있지. 그러니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몫을 먹어 치웠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이지를 보고 있던 아이반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호기심이 왕성하니까요.”
어깨를 으쓱하고 남은 고기찜을 먹어 치웠다.
“미엘린이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네요. 종종 저택에서도 해 봐야겠어요.”
“오래 걸리진 않나요?”
내가 이 동네 와서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여기에서 쓰는 향신료와 양념은 한국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지도 못하는 것이다.
뭐가 뭔지만 알면 김치도 도전해 보고 할 텐데 말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미엘린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 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시간이 되면요. 아이반도 무리하지 말아요. 바쁜 거 다 알고 있는데…….”
“알겠습니다.”
아이반이 미소 지었다. 데이지까지 식사를 끝낸 후에는 디저트 시간이었다. 데이지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다. 단것을 평소에 제한하고 있기도 했고 아이반이 살짝 말해 준 바에 의하면 데이지가 케이크 데코하는 걸 도왔단다.
나는 빵빵한 리액션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이반이 케이크 초에 불을 붙여서 가지고 왔다. 엉성하게 얹힌 하얀 생크림과 그 사이사이의 과일들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잔뜩 몰두한 얼굴로 저걸 하고 있었을 데이지를 떠올리니 말이다.
“데이지가 만들었어요, 미엘린!”
“정말? 나는 사 온 줄 알았지! 이렇게 예쁜 케이크는 처음이야!”
“우와!”
데이지가 내 팔을 붙들고 까르르 웃었다. 데이지의 뺨에 키스해 주고는 촛불을 훅 불어 껐다.
“생일 축하해요, 미엘린.”
“축하해요, 미엘린!”
데이지를 꼭 끌어안았다. 강아지처럼 내 품에 파고드는 데이지를 안고 있으니 오늘이 더 완벽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아이반. 데이지도.”
정말로 행복한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