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생일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크리스티나가 도도한 얼굴로 거대한 선물 상자를 내민 것이다.
“그동안 못 준 거 만큼이야.”
“그게 이만큼이나 된다고?”
크리스티나가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질릴 정도로 큰 상자를 뜯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로시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세상에…….”
그 안에 든 것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왕국에서 신봉하는 종교의 유일신을 묘사한 것 같았다. 이 조각상에서 가장 대단한 부분은 품에 안고 있는 거대한 구체였다. 은은한 광채를 뽐내는 것이 진주가 분명했다.
“큼. 요새 틸리언즈 저택에 올 일이 있었거든. 홀이 조금 허전한 것 같아서 준비해 봤어. 거기에 두면 좋을 것 같아.”
“……고마워, 크리스티나.”
역시 부자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건가. 선물부터가 스케일이 다르다. 나는 다음에 선물로 뭐…… 수련장이라도 지어 줘야 하는 건가.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을 때 크리스티나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너무 고민하지도 말고 부담 갖지도 말고.”
역시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이 정도는 아닌 거지?
“결혼 선물 겸 생일 선물인 거니까.”
“…… 그렇구나……. 집사장을 불러와야겠어, 로시에.”
“네, 부인!”
로시에가 상기된 뺨으로 집사장을 찾으러 뛰어나갔다.
“그런데 꼬맹이는 언제 일어나?”
“아. 곧 일어나서 올 거야.”
조금 진정이 된 가슴을 쓸어내리곤 대답했다.
“오늘 연회에도 꼬맹이도 참석하나?”
“당연하지. 그래도 일찍 들여보내서 재우려고 해. 데이지는 밤 9시면 자야 하거든.”
“아기는 아기구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얼마 전엔 케이크도 만들어 주던데. 생일이라고.”
“세상에…….”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우리 조카들은 케이크를 만들기는커녕 먹느라고 바쁜데.”
“남자애들이잖아.”
“여자애들도 그래.”
회한이 어린 얼굴로 크리스티나가 이마를 짚었다.
“다음에 데리고 오는 건 어때? 케일린이라고 데이지 친구도 있는데 같이 놀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일단 물어보고. 애들 데리고 간다고 하면 분명 좋아들 하겠지만.”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로시에와 집사장이 왔다. 집사장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그란 구체가 내뿜는 은은한 광채를 확인한 집사장의 입이 벙하니 벌어졌다.
“……정말…… 엄청난 물건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내가 추임새를 넣자 집사장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 말이 홀에 장식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어떻게, 자리가 있을까?”
“네! 당연히 있습니다. 사실 저택을 보수하면서 낡은 조각상을 보수 보낸 상태였거든요. 그 자리에 이걸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잘됐군.”
“가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하인들로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게. 천천히 해도 되네.”
집사장이 흥분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점잖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본다. 고개를 내젓자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나저나 듣기로는 선물을 아주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내 앞으로 나오는 예산을 떼어 내서 사용인들에게 돈을 지급할까 생각 중이야.”
“흠. 나쁘지 않아. 그렇지, 로시에?”
“예! 크리스 영애. 다들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공작 부인 마음이 편하시다면 그러셔도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그런 걸 바라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바비큐 파티를 하는 건 어떨까?”
“바비큐…… 파티요?”
다 같이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야영지에서 하는 것처럼 말이야.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술도 나눠 마시고. 음식도 나눠 먹고. 어때? 비용은 내가 내도록 하지.”
“다들…… 너무 좋아하지 않을까요?”
“흠. 그러면 화요일 즈음에 다 같이 일과를 이르게 마무리하고 하는 것도 좋겠군.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싶은 걸 조사해서 풍족하게 하도록 하게.”
“공작 부인…….”
로시에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고기도 가장 좋은 것으로 떼어 오고.”
“공작 부이이이인…….”
“다만 준비를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군.”
“다들 기쁜 마음으로 준비할 겁니다! 틸리언즈의 축제로군요!”
“아이들도 데리고 오도록 하게. 귀가가 늦어지면 걱정할 테니 같이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것도 좋을 거야.”
“공작 부이이이이이이이인…….”
더 길어졌다. 로시에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장소는 집사장과 협의해서 정하도록 하게. 때마침 오는군. 집사장.”
“예, 공작 부인.”
“다음 주 화요일 즈음에 바비큐 파티를 할까 하는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해서 로시에, 하녀장과 함께 준비하도록 하게. 다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조사해서 준비하도록 하고. 주방장에게는 인센티브를 지급해야겠어.”
“예……! 그 부분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마음속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나니 더 편안해졌다. 집사장이 하인들을 부려 조각상을 가지고 나갔다. 한차례 소란을 겪고 나니 데이지가 왔다.
“미엘린!”
“응?”
“이렇게 커다랗고 이렇게 생긴 걸 봤어요!”
“내 선물이야, 데이지. 어때, 대단하지?”
“이익!”
데이지가 부르르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머리띠와 리본들이 그에 따라 흔들렸다.
“내가 더 대단해요! 내가 직접 케이크도 만들었다고요! 그렇죠, 미엘린?”
“물론. 우리 데이지가 제일 대단했지.”
“그것 봐요!”
데이지가 울먹거리며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런 데이지를 무릎에 앉히고는 크리스티나가 머리를 양옆으로 묶어 주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네가 제일 대단했어.”
여태 데이지는 자신의 선물이 가장 좋았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그런 데이지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이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데이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데이지가 제일 좋죠? 선물이 안 대단해도 데이지가 최고죠?”
“그럼. 우리 데이지가 최고지.”
그 말에 데이지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역시 어린애들의 단순함이란.
“제가 제일 좋대요, 크리스.”
“나도 네가 좋아, 데이지.”
크리스티나의 말에 데이지가 방긋 웃었다.
“자, 그러면 데이지. 미엘린이 준비하는 동안 나랑 놀고 있을까? 그건 어때?”
“좋아요! 그러면 미엘린이 공주님이 되는 건가요?”
“공주님?”
“어제 숙부님이 읽어 주신 동화책에 나온 공주님이 정말로 예뻤어요. 이렇게 이렇게 생긴 드레스도 입고!”
“그랬어? 오늘 데이지는 어떤 드레스를 입을 건데?”
“음……, 노란색으로 입고 싶어요.”
“그것보다 나는 하늘색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걸 입으면 데이지가 공주님이 될 수 있을걸?”
“정말?”
“정말.”
다행히 크리스티나에게 데이지를 맡겨 둬도 될 것 같았다. 대체 나를 어떻게 꾸밀 생각인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로시에가 날 재촉했다.
겁먹은 목소리로 로시에에게 물었다.
“뭘 할 생각인 거야? 날 데리고.”
실험실 유리병 속 개구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로시에가 생긋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안 해요, 공작 부인.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죠.”
로시에가 나를 욕실 안에 부드럽게 밀어 넣고는 가운을 벗게 도왔다. 욕실 안에는 하녀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욕조와 그 앞에 마사지 대와 수많은 향유.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고난의 시작인 것 같았다.
터덜터덜 걸어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로시에와 하녀들이 꽃잎을 띄우고 향유를 부었다.
내가 준비를 마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중간에 점심 먹은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거의 5시간을 소모한 거였다. 크리스티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고 지친 데이지는 낮잠에 빠져 있었다.
“후우. 벌써 지치는 것 같아.”
“뭘 이 정도로. 시작도 안 했는데. 배고프니?”
“배고픈 것도 모르겠어.”
하녀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중간중간 나를 잘 챙겨 먹였다. 시키는 대로 먹고 움직이다 보니 깨끗하고 예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도 정말 예쁘네. 드레스에도 엄청 공을 들인 것 같은데.”
“그러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들뜬 것 같다니까. 너도 고생했다며.”
크리스티나가 흠칫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머저리 같은 에르긴에게서 벗어나서 첫 생일이잖아. 완벽해야 했다고.”
“고마워, 크리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뭘.”
“내가 잘할게.”
“큼큼. 그래, 앞으로 기대하겠어.”
크리스티나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무릎을 베고 자고 있던 데이지를 번쩍 안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