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AW
“데이지. 아가. 그만 일어나야지?”
“우웅…… 우웅……. 공주니임……?”
말을 늘이며 눈을 뜬 데이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응, 공주님이요. 미엘린 공주님 됐어요! 진짜 예뻐요.”
데이지가 크리스티나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외쳤다. 사실 요새 데이지 상태라면 내가 넝마를 입고 있어도 이쁘다고 해 줄 가능성이 컸다. 그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이 높았다.
“공주님은 데이지가 더 예쁘다는데?”
“정말로?”
“그럼!”
데이지의 볼에 키스했다. 말랑한 볼이 정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금발의 아기 천사처럼 느껴졌다.
“미엘린. 오늘도 생일이에요?”
“맞아. 미엘린은 오늘도 생일이야.”
크리스티나의 속삭임에 미엘린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면 미엘린은 두 번 태어났어요? 생일은 태어난 날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데이지도!”
“데이지도?”
“데이지도 미엘린한테서 다시 태어날래요.”
데이지가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깜찍한 말을. 데이지 네가 최고인 이유를 알겠다.”
크리스티나가 데이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데이지가 답답하다는 듯이 몸부림을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자, 데이지. 데이지도 드레스 갈아입으러 가자. 무슨 색 입을 건지 정했어?”
“하늘색이요!”
크리스티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이 나이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공주님인 법이지.”
너무나 옳은 말이었다.
* * *
원래 오늘 연회에는 13세 미만의 아이는 초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일린은 특별히 초대되었다. 데이지가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연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케일린과 데이지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
공주님이 꿈인 아이들을 위해서 요술봉을 만든 것이다.
주문 제작했기에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거였다. 가벼운 소재로 만들었는데 화려하게 세공한 봉과 그 위에 달린 장식이 카드캡X 체X 요술봉처럼 생긴 거였다.
사실 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주려고 한 거였는데 오늘 특별히 개봉했다.
“이건 케일린이랑 데이지 선물.”
“우, 우와!”
케일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데이지도 자신의 요술봉을 이리저리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주님들에게는 이런 게 있어야지. 그렇지?”
“네!”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마음에 드니?”
“네!”
“그러면 요술봉에 이름을 붙여 주는 건 어떨까? 로시에가 도와줄 거다.”
로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아이들은 저녁을 먹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로시에가 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잠시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몇 달 동안은 끌어안고 자겠군요.”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은 케일린을 데리고 온 프란시스의 장녀, 실리일라였다.
“항상 감사합니다. 요새 케일린이 틸리언즈 저택 이야기만 입에 달고 살아요. 재밌게 지내고 오는 것 같더군요.”
“케일린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다행이군요. 제가 아이를 돌보는 건 처음이라서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었거든요.”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건 물론 알고 있었다. 이건 부드러운 대화를 위한 약간의 위트랄까?
“별걱정을 다하시네요, 공작 부인. 케일린이 매일같이 틸리언즈에 놀러 가고 싶다고 해서 곤란했답니다.”
“좋아해 주니 다행이네요.”
“저런 선물을 주셨으니 케일린 마음속에서 최고는 공작 부인일지도 모릅니다.”
“영광이로군요.”
실리일라가 작게 웃었다. 케일린과는 15살 차이가 나는 이였다. 그러다 보니 케일린의 언니라기보다는 나와 크리스티나와 나이가 비슷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다른 손님들도 접대하셔야 할 텐데 제가 더 이상 시간을 빼앗을 순 없겠군요.”
“다음에 한 번 더 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영광이지요, 공작 부인.”
실리일라가 예의를 갖추고 물러섰다.
그다음에는 정말로 손님의 홍수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미엘린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온 것이다. 물론 미엘린이 아니라 그녀의 뒷배경을 보고서 온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생일 축하한다면서 사업 이야기를 꺼내는 이도 많았다.
머리가 빙빙 돌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이반……, 생일이 원래 이런 건가요?”
“보통은……. 괜찮습니까?”
“저는 앞으로 생일 없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태어난 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날로 하시죠.”
“하늘?”
아이반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나를 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눈빛이었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간에 받아 줄 것 같았다.
“네. 새가 물어다 줬다든지.”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날이나 새가 물어다 준 날을 기념일로 삼으면 되겠군요.”
“……피할 수 없다는 거죠?”
허덕이는 나를 아이반이 발코니로 이끌었다. 하인을 앞에 세워 놓고 문을 닫으니 바깥과 차단되어 그나마 살 만했다. 대체 저 많은 사람이 어디서 몰려온 거지?
“만약 공작 부인의 생일 파티를 하지 않는다면 공작 가가 망했다는 소문이 돌 겁니다.”
“……그것도 그렇겠군요.”
아이반이 내게 손부채를 해 주었다.
“많이 힘듭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런 걸 매년 해야 한다니.”
“매년이 아니라 공작 가에서 열리는 연회마다 이런 걸 해야 할 겁니다. 미안해요, 미엘린. 미리 말하지 못했군요.”
아이반이 내게 사과했다.
사실 이건 아이반이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약간 집순이 기질이 있어서 그렇지 이곳 사교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귀부인들은 즐기기도 했고.
내가 여기에 들어와서 참석한 연회가 이번이 두 번째라니.
사실 그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공작 부인으로서 사교 활동을 아예 접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에요. 이건 공작 부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 중 하나라는 거 알아요. 그냥 투정 한번 부려 봤어요.”
어깨를 누그러뜨렸다.
“생일이 생일 같지도 않고……. 차라리 저는 아이반과 별장에 간 게 정말 좋았어요.”
“……그랬군요. 스타티스의 조언을 듣길 잘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연회를 한 번 더 준비할까 했…….”
“으.”
인상을 찌푸리자 아이반이 말을 멈췄다.
“큼. 정말 취향이 아니라서……. 미안해요.”
“별말씀을.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아이반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한담을 하는 게 훨씬 더 즐거웠다.
“데이지가 빨리 공작 위를 물려받았으면 좋겠어요.”
나도 모르게 본심을 터놓았다.
“네?”
“앗……”
아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엘린은 이런 연회에 참석할 일이 줄어들겠군요. 그리고 저도 쉴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우리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약속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작당하고 있을 때 순진한 데이지는 케일린과 요술 공주님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귀엽기도 하지.
* * *
정말로 어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밤이 늦는 것도 모르는지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느라고 바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생일을 축하받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저택 부지 밖으로 벗어나는 날이었다. 왕비가 나와 리엔스터 백작 부인을 초대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칩거를 끝내고 직책을 맡았으니 일을 벌인 듯했다.
“이게 얼마 만의 외출이냐.”
바깥에 흘러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내내 안 나오다가 이렇게 한 번 나오는 건 괜찮은 듯했다. 내가 아이반과 결혼하고 나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정말로 밖에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게 해결된다는 점이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점인가?
아무튼.
오늘 모임은 차라리 어제보다 나을 것 같았다. 어제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도 오긴 했지만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눌 시간이 없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도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왕비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당도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