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제가 제일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비 전하.”
“그간 잘 지냈나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이렇게 모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왠지 모르게 리엔스터 백작 부인과 왕비 사이가 가까워 보였다. 세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서먹한 사이라거나, 3번 초대하면 1번 응한다거나. 그런 사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너무나 편안했다.
왕비가 내 의문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작게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도 모르겠군요.”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왕비 전하.”
“그런가요? 사실 어렸을 적에 제가 잠시 리엔스터 백작 부인과 지낸 적이 있었거든요.”
“아……?”
“제 돌아가신 고모님과 백작 부인께서 절친한 친구이신데 어릴 적에 신세 진 적이 있었어요. 오래된 일이라 사람들이 모르기도 하고…….”
“관심이 없으니 잊힐 만한 일이지요.”
“그 이후로도 꾸준히 연락을 하면서 지냈는데 제가 왕비가 되고 나서는 영 상대해 주시질 않아서 구걸하는 중이었어요.”
“구걸이라니.”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만 제도에 오면 부인을 자주 뵐 수 있을 줄 알았다고요.”
왕비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저런 얼굴을 하니 가뜩이나 동안인 왕비가 더 어려 보였다. 지금 임신 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교복을 입으면 중학생으로도 보이겠는데.
“그건 불가한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권력이나 왕실에 일에 깊게 얽히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주 왕비 전하를 뵙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관심을 받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소문이 그런 식으로 난 거랍니다. 아, 물론 제가 구걸하는 건 이런 차 한 잔이지만요.”
왕비가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요컨대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거잖아? 리엔스터 백작 부인 앞에서 왕비는 정말로 소녀가 되었다.
“앞으로는 공작 부인과 시간을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또래이시니 잘 어울리실 수 있을 겁니다.”
화살이 내게로 돌려졌다. 얌전히 차를 마시고 있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갑자기 왕성으로 돌아올 때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가끔 이렇게 나오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던…….
“공작 부인, 그래서 말인데 제 친구가 되어 주겠어요?”
“……콜록.”
인생사 정말 모르는 거라니까. 내가 왕비하고 친구도 다 해 보다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왕비 전하.”
왕비가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왕비 전하. 이야기를 마치고 업무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랬죠.”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음. 사실 자선 모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자선 모금이라면…….”
“제가 가정복지부 장관이 되어서 맡은 첫 번째 임무가 빈민굴을 정리하는 겁니다. 빈민굴에 사는 이들을 위한 집을 공급하고 그들의 사회화 및 직업 교육을 돕는 것.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일을 하기에는 왕실 돈이 부족한 상황이라 자선 모금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좋은 일로 하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만삭이다 보니 연회 준비를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서요. 공작 부인이 맡아서 연회를 준비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번 생일 연회가 아주 성대하고 괜찮았다죠?”
“그건…… 제가 아니라 인체스터 가문의 크리스티나가 준비한 연회였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티나 영애도 이 자리에 불러야 했던 거군요.”
왕비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역시 크리스티나 영애도 함께 만나는 게 좋겠어요. 다음 살롱에는 영애의 자리도 준비하려고 생각 중이랍니다.”
크리스티나, 미안.
열심히 일하고 있을 크리스티나에게 심심한 인사를 건넸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러면 공작 부인이 맡아서 진행해 주는 거지요? 크리스티나 영애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관습상 왕비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건 결혼한 귀부인뿐이거든요. 미혼인 영애들은 나이가 어떻든 간에 온전한 어른으로 여기질 않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리엔스터 백작 부인. 전에 부탁드렸던 건 잘 처리되었을까요?”
“유능한 직원 덕에 수월하게 처리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공작 부인.”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가이스와 에르긴의 일로 부탁한 것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 에르긴과 가이스에게 넘어가는 척해 달라고 했다. 내 계획을 들은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찬성했고 그들의 사업은 무사히 가정복지부의 심사를 통과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저도 알고 싶어요.”
왕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망설이다가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고 왕비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나, 정말로 공작 부인이 마음에 들 것 같아요. 그런 속 시원한 복수라니!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거잖아요?”
왕비가 까르르 웃었다.
“다만.”
왕비가 묵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 일은 반드시 문제 될 소지가 없이 마무리되어야 할 겁니다. 왕께서 가정복지부 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세요. 이로 인해서 가정복지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역시 왕비는 왕비네.
“주의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나저나 자선 연회라니. 내 인생에 낯선 게 계속 끼어드는구나. 그들이 사는 세상에 편입하다니.
왕비의 이름으로 열리는 행사이니 절대적으로 잘해야 할 텐데. 부담감이 어깨에 얹혔다.
* * *
자선 모금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크리스티나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티나는 기껍게 내 초대를 받아 주었다.
“부탁할 일이 있다고?”
“이번에 왕비 전하께 자선 모금 연회 주최를 일임받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멈칫했다.
“그래서 그걸 나에게 도와달라는 거야?”
“응. 괜찮을까? 시간이 되겠어?”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하시겠군.”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사실 왕비와 이런 일로 엮여 친분을 만드는 것은 귀족 사회의 일원이라면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다. 크리스티나의 뺨이 상기되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이번 내 생일에 참석하셨고 그것을 왕비 전하께 말씀드렸나 봐. 그게 마음에 드신 것 같더라고. 왕비 전하께서는 다음 살롱에 네 자리도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어.”
“정말?”
크리스티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간 내가 왕비를 만나는 일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결혼도 안 한 영애가 그 모임에 끼는 건 내가 거의 최초일 거야!”
크리스티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잘 둬서 이게 무슨 일이람. 미엘린, 고마워!”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연회 준비는 당연히 도울 거야. 홀은 어디로 생각 중이시래?”
“왕성에 있는 에반티움 홀을 개방할 생각이라고 하셨어.”
“에반티움?”
왕이나 왕세자의 대관식, 왕의 결혼, 혹은 왕족의 결혼이 있을 때만 열리는 웅장한 홀이었다. 거기에서는 웬만큼 대단한 행사가 아니고서는 연회를 여는 것도 드물었다.
“그곳에서 연회를 한단 말이야? 내가 거기를 꾸미는 거고!”
“그래.”
“세상에.”
크리스티나가 현기증이 난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나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이 나라의 진성 귀족이었고 나는 중간에 끼어든 입장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별생각 안 들던데.
아니면 아직 가 보지 않아서 이러는 걸 수도 있고. 크리스티나는 에반티움을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쉴 새 없이 열거했다.
“커튼을 금사로 수놓은 흰색 천으로 하는 건 어떨까? 꽃을 수놓게 하는 거지. 역시 이런 일에는 조금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는 게 좋을 테니까. 들풀을 수놓는 것도 좋겠어.”
“들풀?”
“꺾이지 않는 들풀로 빈민굴을 형상화하는 거지.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해.”
크리스티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러다 보니 데이지와 케일린의 교습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
“음?”
“오늘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인데.”
내가 생긋 웃자 크리스티나가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의도적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