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62화 (62/92)

62화

“음?”

모르는 척했다.

“오늘 날 부른 거 말이야. 의도적인 거였지?”

“모르겠는데.”

눈을 돌렸다.

“아니이……. 네가 아이들을 잘 놀아 주더라고. 나는 몸으로 놀아 주는 건 잘하지 못해서…….”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가볍게 했다.

“몸을 좀 풀어야겠는걸. 소풍이라. 좋지. 나는 데이지를 만나면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더라. 걔는 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귀엽니?”

“……날 닮아서?”

“얼씨구.”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풍에 크리스티나의 합류가 결정되었다. 오늘도 즐거운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꺄아아아!”

“꺄아!”

데이지와 케일린이 눈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크리스티나를 쫓아서 빙글빙글 돌았다. 관리인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확실히 아이들이 놀기에 딱 적당한 장소였다.

풀독이 오를 위험이 있어 부러 아이들에게 승마복을 입혔는데 잘한 결정인 것 같았다. 지금 저렇게 뛰어놀기에는 역시 바지가 최고지.

크리스티나가 손뼉을 치는 쪽으로 비틀거리며 쫓아가던 아이 중 케일린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나 얼마나 신이 났는지 그냥 벌떡 일어나서 다시 크리스티나를 쫓아갔다.

사실 부드러운 흙인 데다가 잔디로 덮여 있어서 다칠 것도 없었다. 놀라서 일어서려고 했던 몸을 다시 주저앉혔다. 뒹굴면서 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이 뺨이 상기되고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뛰어놀았다.

술래잡기를 끝내고 나서는 물가에 발을 담그고 물고기를 쫓았다.

“그쪽으로 가잖아!”

“크리스! 이거 잡아 주세요!”

“쉿. 그렇게 목소리가 크면 물고기들이 다 도망간다니까?”

“크리스……, 이거 좀 잡아 주세요…….”

목소리를 작게 낮춘 케일린이 속삭였다.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대한 망 안에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도 뛰어난 어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부 그물 안에서 빠져나갔다.

“꺄아아!”

물고기를 뒤쫓던 케일린과 데이지가 동시에 넘어졌다.

“로시에.”

“네, 부인.”

“아이들 목욕 준비는 해 두고 있겠지?”

“예.”

로시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즐거워 보이세요.”

“애들은 밖에서 뛰어놀기도 해야 해.”

“요새 확실히 데이지 아가씨 먹는 양도 많이 느시고 부쩍 자라셨어요.”

“햇빛이 아이들을 키운다고 하지 않니.”

턱을 괸 채로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세 사람을 응시했다. 절대로 깨뜨리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아무리 넘어지고 굴러도 두 아이는 울음은커녕 얼굴 한 번 찌푸리질 않았다.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뛰어다니는 것이다.

하도 뛰어다니니 젖은 옷도 금세 말랐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슬금슬금 내 옆에 모여들어 낮잠에 빠져들었다. 크리스티나가 두 아이를 꼭 끌어안고 피곤한 눈을 붙였다. 그 위에 로시에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 저기. 공작님께서 오시는군요.”

로시에의 말대로 아이반이 오고 있었다. 손에는 바구니를 든 채였다.

“아이반.”

“다들 잠들었군요. 저는 식사 배달을 하러 왔는데.”

아이반이 바구니를 흔들었다.

“소풍 와서 먹기 좋은 음식들을 엄선해서 주방장이 만들어 준 것들입니다. 뛰어놀고 먹기에 그만이라고 하더군요.”

“곧 일어날 거예요. 잠든 지 꽤 됐거든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놨다.

아이반이 자연스럽게 내 이마에 키스했다. 아이반이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내 옆에 앉았다.

“잘 놀았습니까?”

“저는 잘 쉬었고 저 애들은 잘 놀았죠. 크리스티나가 아이들하고 잘 놀거든요.”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없었더라면 이 소풍은 아주 조용한 소풍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애들이 뛰는 것을 보다가 밥을 먹었겠지.

나와 크리스티나의 성향은 이런 면에 있어서는 정반대였다. 크리스티나를 초대한 건 아주 잘한 일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 두 아이는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크리스티나 영애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 꼭 갚을 일이 있을 거예요. 석 달 후 크리스티나의 생일이 돌아오거든요.”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살랑이는 바람에 세 사람이 깨어났다.

“우우웅.”

눈을 비빈 데이지가 눈앞에 아이반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숙부!”

“데이지.”

아이반이 데이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케일린이 망설이다가 같이 그 품에 안겨들었다. 데이지가 그러니 자기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이반은 거리낌 없이 두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식사를 가지고 왔는데. 당연히 먹을 거지?”

“네!”

두 아이가 합창하듯이 대답했다.

케일린은 꽤 입이 짧은 아이라고 들었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두 아이는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다시 뛰어놀다가, 다시 먹었다.

저녁 해가 떨어질 때까지.

* * *

데이지는 밤새 나와 아이반 사이에 누워서 자기가 얼마나 용감한 아이인지 피력했다. 넘어져도 울지 않았다면서 살짝 붉어진 무릎을 내보였다. 아이반은 아이에게 맞춰 과장되게 호오, 호오 불어 주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데이지!’

그 말에 데이지는 한참 동안 기분 좋게 재잘거리다가 잠들었다. 나와 아이반과 자고 싶다는 부탁을 들어줬더니 늦은 시간까지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자고 있었다.

“어머. 아가씨가 여기서 주무셨군요.”

아침에 나를 시중들기 위해 찾아온 로시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잠들기 전에 베개를 들고 찾아왔거든. 아이가 깰 수도 있으니 조용히 움직이지.”

“네, 부인.”

데이지가 일어날 때까지 나와 하녀들은 까치발을 한 채로 조심조심 움직였다. 아이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데이지는 어제 힘들게 놀긴 했는지 더 늦은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장담하는데 아마도 케일린도 그랬을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아이들이 방전될 때까지 함께 놀아 줬으니 말이다. 역시 기사 수련을 받았던 사람은 다른 건가? 물론, 중간에 아이반이 가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에너지를 가져오길래 지치지 않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정도면 에너지의 근원쯤 되는 거 아닐까?

“오늘부터 에반티움에서 열릴 자선 행사를 준비할 예정이야. 한동안은 바빠질 것 같네.”

“왕비 전하께서 일을 맡겨 주신 건가요?”

“그래.”

“잘됐네요! 제 사촌 언니의 친구의 동생이 왕실에서 일하는데 사실 지금 왕성의 실세는 국왕 전하가 아니라 왕비 전하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네가 귀여우니까 모르는 척해 줄게, 로시에.

로시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그러니 왕비 전하와 친분을 쌓아 두면 공작 부인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숨을 죽이고는 대단한 비밀을 누설하는 것 같은 얼굴로 로시에가 다다다 말했다.

“정말 고마워, 로시에.”

“이 정도로 뭘요.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가장 먼저 듣고 가장 먼저 알려 드릴게요.”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로시에가 콧대를 세웠다.

그 모습이 정말로 귀엽기 짝이 없었다. 아이코, 귀여워. 이 저택 사람들은 다 귀여운 건가? 아이반 말고는 다 귀여운 것 같았다. 아이반은…… 음. 남자주인공의 정석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여서 귀엽다기보다는…….

설렘.

잘생김.

존재 자체가 설레는? 그런 느낌이었다. 진실로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타입. 나조차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반이라, 아이반.

사랑을 논하기는 무서운데 그렇다고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처음 만난 남자가 아이반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아이반을 사랑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이 일은 천천히 기다려 봐야 할 일이었다. 나 또한 시간이 약이 되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니게 되기를. 배신을 걱정하기보다는 사랑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