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크리스티나는 이번에도 실력 발휘를 했다. 모두가 참석하기로 한 자선 모임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것이다. 역시 나는 이런 면에서는 크리스티나를 따라잡기는 멀었다.
음, 크리스티나는 활달한 여우라면 나는 차갑고 음험한 뱀?
오히려 뒤에서 머리 쓰는 게 더 편하다고나 할까.
자선 모임에는 제도에 사는 모든 귀족이 초대되었다. 초대장은 왕비가 직접 준비했다. 그런 소일거리라도 있어야 한다나. 왕비는 나와 크리스티나를 초대해서 몇 번이나 식사를 했고 그 소식은 사교계에도 퍼져나갔다.
크리스티나 말로는 평소에 오는 초대장의 두 배가 오고 있단다. 크리스티나는 몇 번 참석했던 모양이었다. 내게도 권했지만 나는 절대, 네버. 그냥 저택에서 데이지와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즐거웠다.
그리고 클로린, 웨스턴과 함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일주일이 꽉 찼다. 결국, 왕비를 제외한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왕비를 내가 무슨 수로 거절해.
크리스티나 말로는 사교계는 두 갈래로 양분되었단다.
한 갈래는 나를 동정한다고 했다.
내가 에르긴에게 상처받아서 더 이상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는 거라고.
그리고 한 갈래는…… 속된 말로 싸X지가 없단다.
나는 그에 대해서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뭐. 대신 이런 굵직하고 커다란 연회는 빼먹을 생각이 없었다. 이건 공작 부인의 의무였으니.
“벌써 지루하다는 얼굴 금지.”
“그치만 지루한걸.”
“미엘린? 예전에는 이런 연회를 좋아하더니.”
“나이 들었나 봐.”
크리스티나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내게 칵테일 잔을 건넸다.
“왕비 전하께서 우리의 공을 그렇게 치켜세우셨는데 그런 얼굴 할 거야?”
크리스티나가 타박하고 있는 새에 뒤쪽으로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얼굴과 이름 둘 다 기억 안 나는 엑스트라 1 되시겠다.
“공작 부인, 저는…….”
나는 기계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본 크리스티나가 혀를 찼다. 귀에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완전 가식적이야.’
아무튼, 사회생활만 잘하면 됐지, 뭐.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요.”
“어머……!”
“왕비 전하께서 이번 연회에 신경을 많이 쓰셨답니다. 편안히 즐겨 주세요.”
“왕비 전하와 인연이 깊으시다고는 전해 들었어요. 그런데 요새 사교 모임에 잘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었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
아, 대표로 묻는다는 건가?
크리스티나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게 말을 건 여자가 기대감이 가득해서는 내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로 물었으니 반드시 대답을 들어가야겠다는 것 같은데.
“……지금은 공작 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제가 공작 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하군요. 아이반을 챙기고 데이지를 챙기는 거로도 하루가 너무 바빠서요.”
적당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감명받은 얼굴을 했다.
“하긴……! 소문에 의하면 소공녀를 아주 잘 돌보고 계신다더군요! 사실 결혼해서 갑자기 아이가 생겼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적응하느라고 시간이 걸릴 만도 하군요.”
크리스티나가 내게 표정으로 말했다.
‘얼씨구?’
큼.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이런 일은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일이 좀 핫했어야지.
“그러면 좋은 시간 보내세요, 부인.”
“네, 공작 부인.”
여자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갔다. 정말로 내 근황을 캐내려고 파견된 스파이가 맞았는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지인들에게 달려갔다.
“적응이 힘들었구나. 벽난로 앞에서 감자 먹던 네 모습이 안 잊히는데.”
“큼.”
딴청을 피우는 나를 크리스티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응시했다.
“이 정도면 동정 여론에 힘이 실리겠지?”
“너는 정말로…….”
“뱀 같다고? 나도 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크리스티나가 혀를 찼다. 아, 연회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내 팔을 끌어안고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는 데이지가 보고 싶어졌다.
* * *
아이반도 나름대로 연회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 아이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절로 미엘린이 있는 자리를 쫓게 되는 것이다.
미엘린은 크리스티나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몇 사람에게 응대해 주었다. 미엘린은 요령 있게 잘 쳐내고 있었다.
미엘린과 아이반이 눈이 마주쳤다.
미엘린이 생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조급증이 올라왔다. 미엘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봐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미엘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봐 준다.
장난을 치듯이, 한 번, 두 번, 세 번.
아이반이 작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에메랄드 눈동자가 아이반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반이 손으로 입으로 가리고 웃었다.
“왜 그러나?”
헨리 왕이 아이반의 옆구리를 찔렀다. 분수대에 걸터앉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헨리 왕이 아이반이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엘린이 그곳에 있었다.
헨리 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좋은가?”
“……자네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아이반이 작게 대답했다.
“정말 사람 일 모르는 거지. 그 감정에 정말로 자신 있나?”
“그 말 왕비 전하께서도 꼭 들으셨으면 좋겠군.”
“……실언했네.”
헨리도 웃음을 터뜨렸다.
미엘린과 아이반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눈꼴시기는 했지만 방해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항상 행복에는 불행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것인지.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공작님.”
세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반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반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세리나를 보았다. 세리나는 지금 최대한의 용기를 끌어낸 거였다. 헨리 왕과 함께 있는 아이반이라니. 그러나 아이반이 혼자 있는 시간을 기다릴 틈이 없었다.
그는 유명 인사답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말이다.
“미엘린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세리나가 침을 삼켰다. 세리나를 돌아보는 헨리 왕의 시선이 느껴진다. 에르긴과 세리나의 결혼을 명했다던 왕 아니던가. 헨리 왕의 한마디로 제 목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다.
세리나가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미엘린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제발요.”
아이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헨리 왕이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턱짓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들어라도 주는 게 좋겠군.”
“후우.”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갑게 말한 아이반이 앞장섰다. 세리나가 휘청이는 다리를 다잡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 모든 것은 미엘린을 위한 일이었다. 세리나는 미엘린을 위해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차갑게 세리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에르긴의 말이 맞는다는 걸 확신했다.
자신에게도 저렇게 차가운데 미엘린에게는 또 어떻겠는가.
아이반이 세리나를 데리고 간 곳은 오픈된 공간이었다.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회랑. 세리나가 손을 앞으로 모았다.
“미엘린에 대해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아이반이 차갑게 물었다.
“그…… 미엘린이 요새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요. 제가 아는 미엘린은 사교 모임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아이반이 미엘린을 떠올려 보았다. 요즘 미엘린은 이런 자리에 끌려 나오는 것만 아니면 매우 행복해 보였다. 저택에서 필요한 사람들만 만나고 책을 읽고 업무를 보고. 데이지와 시간을 보내고. 작은 행복이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 미엘린이 사교 모임에 가지 않는 이유가 문제가 있어서라고?
‘괜히 따라왔군.’
제 좋을 대로 미엘린을 판단하고 그 이야기를 떠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에르긴 백작과 제 일이 미엘린에게 상처를 남긴 것 같아요.”
그 말이 아이반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미엘린의 상처를 고쳐 줄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지?”
아이반이 처음으로 흥미를 드러냈다. 미엘린에게서 에르긴과 세리나에 대한 상처를 지워 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미엘린이 감정적 겁쟁이가 된 것은 다 그것 때문이니 말이다.
“……미엘린에게 제가 사과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에르긴도 사과를 하길 원해요.”
아이반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와 미엘린의 사이가 풀어진다면 분명 그 상처도 잊힐 거예요.”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무슨 얘길 하나 했더니 결국 저런 소리다. 이 소릴 듣겠다고 여기까지 나와 있다니. 아이반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기적이군. 끝까지 이기적이야.”
“공작님!”
“미엘린이 원하지 않아! 미엘린은 백작이나 당신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해.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군. 차라리 백작이나 당신을 제도에서 치워 버리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러면 트라우마의 근원이 사라지니 외출도 하지 않겠어?”
아이반이 폭력적으로 감정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