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간 세리나를 냅두고 있었던 것은 그로 인해서 미엘린이 상처받지 않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자 아이반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감정 컨트롤을 잘하는 아이반이라고 하더라도 세리나를 참아 줄 수가 없었다. 화해라니!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라니! 이 여자는 꽉 막힌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이반이 세리나를 차갑게 돌아보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목소리를 높인 아이반 덕분에 놀란 세리나가 뻣뻣하게 굳었다. 에르긴은 아이반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반이 목소리를 높이자 두려움이 밀려든 것이다.
세리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세리나가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제자리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주변에서 그들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자들이 몰려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공작님이 당신을 상대해 주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아니…….”
귀부인이 비웃음을 내보였다. 세리나는 지금 귀부인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분명 세리나의 처지를 비웃는 것일 테다. 하지만, 세리나는 에르긴이 당부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무조건 아이반을 미엘린에게서 떼어 내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서 아이반을 유혹하라는 것도 말이다.
“……제게 조언을 구하셔서요. 도움을 드렸을 뿐이에요.”
세리나가 볼을 붉혔다.
“미엘린에게 아직 미숙한 부분이 있었나 봐요. 그 부분에 관해서 물으시길래 가르쳐 드렸어요.”
귀부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러섰다. 그러나 아이반에게 물을 수는 없으니…… 확인 가능한 것은 세리나뿐이었다.
귀부인은 밖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틸리언즈 공작과 세리나 부인이 함께 있는 걸 봤어요. 세리나 부인 주장으로는 공작 부인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조언을 구했다는군요. 그 여자 주장으로는 그래요.’
그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퍼져나갔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을 중심으로.
* * *
자선 모금 연회에서는 꽤 많은 돈이 모였다. 왕과 왕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귀족들이 지갑을 열었던 것이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연회에는 세리나가 왔다는데 보질 못했다. 에르긴은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 말로는 세리나와 아이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물론 불쾌했다. 세리나가 아이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면 그 정신 나간 머리에 총을 쏴 주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하지만, 아이반이 이미 세리나와 만났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 여자가 당신과 화해하고 싶다는군요. 그러면 당신 상처가 치유될 거라나.”
“개소……. 큼큼.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말 믿지 말아요, 아이반!”
“당연하지요. 내가 아는 당신은 그 사람들을 꼴도 보기 싫어하는걸요.”
“그게 맞아요. 아, 정말 끈질겨.”
중얼거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에는 아이반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를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들 이야기로 입맛이 뚝 떨어졌다. 대체 내 인생에서 언제쯤 꺼져 줄 생각인 거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들만 아니었다면 내 삶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텐데 말이다.
“드래곤 클럽은 어떻게 됐어요?”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크로세타 백작이 이미 귀족들을 끌어들이고 있어요.”
“그래서 요새 조용했군요. 어제 나타날 거로 생각했어요. 크로세타 백작이라면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올 것 같았죠.”
“드래곤 클럽은 콧대 높은 자들만 모여 있어서 자선 모임 같은 데에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은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아하.”
돈 귀신들이라는 말이구나. 딱 에르긴하고 어울리네. 고개를 내저었다.
“아 참. 가이스의 제안서도 가정복지부를 통과했어요. 왕비께서 경고하시더군요. 이 일로 인해서 헨리 왕이 실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라고요.”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헨리가 정말 공들여서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거든요. 저도 가이스를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어요.”
“네, 아이반. 뭔가 있으면 알려 줘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먹어요.”
“음. 입맛이 떨어진 것 같아요. 정말로 둘 다 밥맛이야.”
아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건데요?”
말을 슬며시 돌렸다. 생각해 보니 귀족 영애가 그런 말들을 배울 곳이 없다는 게 떠올라 버렸다. 큼. 실수했네.
“그래서 불쾌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재밌습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 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기사들이 종종 그런 말투를 쓰곤 하더군요.”
“그건 선입견이에요. 기사가 아니라도 쓸 수 있는 거죠.”
“그렇군요.”
아이반이 미소 지은 채로 대답했다. 물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데이지 앞에서는 조심해야겠다. 어린애들은 흡수력이 좋으니까.
* * *
가이스의 복지 사업이 가정복지부의 첫 승인을 받아 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지금은 헨리가 내치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가정복지부는 그가 만든 기관이지 않던가.
들어가는 예산도 많다고 들었다. 헨리 왕은 가정복지부를 창설하기 위해서 개인 금고도 열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가이스의 입이 벌어졌다.
가이스의 옆에 계약서가 늘어 가고 있었다. 일정의 후원금을 약속하는 계약서들이었다. 다행히 후원금과 에르긴이 내놓은 돈을 합치면 가정복지부에서 지원해 주는 부지를 살 수 있었다.
“정말로 이게 될 줄이야! 이젠 돈방석에 앉는 건가?”
천문학적인 액수가 쌓이고 있으니 자신이 어느 정도 빼돌리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가이스가 콧노래를 불렀다. 동석해 있던 에르긴이 미심쩍은 눈으로 가이스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돈에 손댈 생각은 말게.”
“뭐? 내가 무슨…….”
“자넨 생각보다 얼굴에 생각이 드러나는 타입이지. 절대로 지금 돈에 손대서 도박할 생각은 하지도 말게! 한동안은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거야.”
가이스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구나? 이 정도 돈이면 조금 슬쩍해도 티도 안 나겠구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러다가 감사가 나오면 어떻게 할 거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감사가 나올 거네. 그 안에 부지를 매입하고 인테리어를 다시 꾸며야 할 거야. 그리고 고아들도 데리고 와야 하지. 그런데 지금 도박이나 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에르긴이 혀를 찼다. 같은 틸리언즈의 핏줄인데 어쩜 이렇게 아이반과 다른지 모르겠다. 아이반은 도박장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을 인물이었다.
한심한 가이스만이 자신에게 남은 패라는 사실에 에르긴은 씁쓸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대안도 없었다. 돌덩이지만 갈고 갈아서 뭐라도 만들어야지.
“일단 조심하겠네. 이 돈을 모아서 저택 부지를 사라는 거잖아. 그 뜻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다행이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에르긴은 당연하게도 가이스를 믿지 않는다. 가이스에게 사람 붙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긴이 역시 한숨 나오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유능한 사람 얻기가 이렇게 힘든가.
도박쟁이를 공작 만들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이건 귀족에 대한 모독이었다. 에르긴이 가이스 몰래 혀를 찼다. 프라이드가 높은 에르긴에게 있어서 사실 가이스를 상대해 준다는 것 자체가 많이 양보한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대는 가이스를 에르긴이 한심하게 응시했다. 오래도록.
* * *
에르긴이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드래곤 클럽에 발을 들였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왕국을 건국한 이는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드래곤 클럽이었다.
들어갈 때는 항상 드레스 코드를 맞춰야 했고 값싼 정장으로는 통과할 수도 없었다. 옷과 격식, 품격과 지위. 그 모든 것을 보는 곳이었다.
그리고 에르긴은 가입한 이후로 한 번도 통과 못 한 적이 없었다.
“아, 에르긴 백작. 이리로 앉으시게.”
하얀 머리를 가다듬은 노신사가 에르긴에게 자리를 권했다. 허허로워 보이지만 이 노신사가 왕국의 금줄을 쥐고 있었다. 금융권에서 큰 가닥을 쥔 사람이란 뜻이다.
“전에 들은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여기에 있는 자들 모두 자네만 기다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