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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65화 (65/92)

65화

“물론입니다, 백작님.”

에르긴이 고개를 조아렸다. 전에 드래곤 클럽에 들러 요새 잡은 투자처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꽤 괜찮은 사업안이었다. 그들은 종종 그렇게 사업에 투자를 하고 키우고 돈을 버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투자처가 있으면 공유하곤 하는 것이다.

“조선 사업입니다. 르웨긴 왕국에서 철을 다루던 사람인데 이번에 조선 사업을 해 보려고 넘어왔답니다. 르웨긴 왕국은 조선이 발달한 데에 비해 우리 왕국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듣고 있던 신사들이 동조했다.

사실 조선 사업이 블루오션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게 큰돈을 투자해서 사업을 벌일 깜냥이 있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 사업을 잘 아는 이도 없었고.

“신원은 확실한가?”

“이미 확인을 끝냈습니다. 여러 가지 루트로 확인했는데 괜찮더군요.”

“그러면 사업안을 가지고 그자를 데리고 와 보게. 직접 실물로 확인해야 큰돈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나.”

“옳은 말씀이십니다.”

에르긴은 이 모임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클럽의 수장인 노백작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네 주고 사업에 관해서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는 게 기뻤다.

노백작은 드래곤 클럽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노백작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에르긴이 뿌듯하게 웃었다. 이런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오다니.

그는 에르긴이 살롱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도 에르긴의 도움을 받으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감언이설에 넘어간 에르긴은 그 일을 드래곤 클럽에도 소개한 것이다. 에르긴은 이 일로 다시 한번 드래곤 클럽에서 명성을 다질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미엘린 또한 에르긴을 다시 봐 줄 것이다. 아이반이 얼마나 발전이 없고 도태된 남자인지 알게 되겠지. 에르긴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 *

데이지가 골몰한 얼굴로 꽃을 엮었다. 난 데이지가 집중할 때 보이는 저 통통한 뺨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턱을 괸 채로 데이지가 하는 것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저 하얀 찐빵 같은 뺨을 한 번만 깨물어 볼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다. 지금 데이지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꽃반지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땀까지 흘리며 노력했다. 데이지의 고사리 같은 손끝은 풀물이 들어 있었다. 녹색이 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데이지의 머리카락이 햇살처럼 고여 있었다.

“어때? 이번엔 될 거 같아?”

“이익. 아니요…….”

데이지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잘해 봐. 이번엔 거의 완성했잖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럴 거예요! 반드시 미엘린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줄 거예요!”

“프러포즈하는 거야?”

“프러포즈가 뭔데요?”

“음. 평생 같이 살자고 하는 거?”

데이지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프러포즈 맞아요!”

아, 이 귀여운 녀석 같으니. 데이지의 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볐다. 데이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깔깔거리는 데이지를 붙들었다.

데이지가 내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리다가 다시 반지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 한 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은 아돌프를 닮았다고 한다.

하긴. 결국엔 힐리아와 결혼하고야 말았으니, 뭐. 그런 끈기라면 데이지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 손길이 또 기분이 좋았는지 또 배시시 웃는다.

이런 아이라면 열 명도 더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얼기설기 엉망이기는 해도 데이지는 꽃반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내 손가락에 걸쳐 놓고는 뿌듯하게 웃었다.

“이제 데이지랑 평생 사는 거지요?”

“약속할게.”

물론, 배신 때리고 이 약속을 깨는 쪽은 데이지일 것이다. 데이지 또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게 될 테니까. 그래도 나는 그런 잔혹한 진실을 알려 주는 대신 아이의 통통한 손가락에 손을 걸고 약속을 해 주었다. 그것으로 아이의 미소가 깊어졌다.

데이지가 반지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던 탓인지 어느새 노을이 정원에 내려앉고 있었다. 데이지와 저택으로 천천히 걸어서 들어왔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이긴 사람이 한 걸음씩 내딛는 게임을 한 것이다.

데이지는 생각을 하다가 늦게 내곤 했기 때문에 나는 쉽게 데이지를 이길 수 있었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데이지를 앞질러 와 버렸다.

“으이이잉……, 미엘린…….”

울상을 한 데이지가 나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자신을 두고 내가 혼자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뛰어 들어오면 될 텐데 게임 규칙을 지키겠다고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팔짱을 낀 채로 데이지를 보고 있었다. 데이지 뒤쪽으로 아이반이 성큼성큼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수련장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땀에 젖어 있었다.

아이반이 데이지를 뒤에서 쑥 안아 올렸다.

“어어어어어?”

갑자기 몸이 들려 놀라던 데이지가 아이반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지는 감정 표현이 확실한 아이였다.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은.

요새 들어서는 엄마, 아빠 이야기를 덜 꺼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걱정스러워서 주치의에게 몰래 물었는데 다행히 데이지가 그들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루하루를 지내는 게 너무 즐거워서 생각을 못 할 뿐이지 잊은 것은 아니라고. 데이지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이다.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반이 슬퍼해서 마음이 아프다는 데이지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나는 데이지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아쉬웠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데이지의 키가 웃자라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빨리 자란다.

“숙부님!”

“데이지.”

아이반이 데이지의 뺨에 키스했다.

“아이! 땀 냄새!”

“그래서 숙부님이 싫은 거야?”

“어어어어, 아니요.”

데이지가 절대로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귀여운 녀석.”

아이반이 데이지를 목말 태운 채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석양을 뒤로한 아이반과 데이지의 모습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지금 확실한 건, 데이지도 목욕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지와 개선장군처럼 걸어오는 아이반을 맞이했다.

“아이반.”

“미엘린.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평소와 같았어요. 데이지와 시간을 보냈죠. 이것 봐요. 데이지에게 받은 선물이에요. 제게 프러포즈했다고요. 그렇지, 데이지?”

“네! 미엘린은 저랑 평생 살기로 했어요.”

그 말에 아이반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이상하게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뭐야, 설마 아이한테 질투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네 엄마는 내 거야’라는 대사가 종종 소설에 등장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현실에서도 들었고. 설마 그런 대사를 하려고?

그러나 아이반이 꺼낸 말은 나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저는 프러포즈하지 않았습니다.”

“네?”

“제가…… 미엘린에게 프러포즈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계약을 맺은 적은 없었지만, 계약 결혼을 한 사이였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맺은 계약 관계. 그런데 프러포즈 같은 게 중요할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반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프러포즈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아요, 아이반. 한 번 준비해 봐요. 나는 모르는 척하고 그 프러포즈를 받아 볼게요.”

아이반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강퍅하게 얇아졌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아이반이 내 감정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내 기대감을 볼 수 있었으리라.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반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 홀려 가만히 그만 보고 있었다. 내게 다가와 아이반이 이마에 키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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