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세리나는 미엘린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미엘린을 구해 내야 할 텐데 아이반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에르긴이 의도한 스캔들을 일으킬 일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반이 무섭기도 했다. 아이반의 눈빛을 떠올려 보면 정말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미엘린을 위해서 용기를 냈다.
대부인이 세리나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네가 바로 식충이구나. 제대로 저택을 관리도 못 하는 주제에 밥만 축내고 있으니. 그러면 네 쓸모를 증명이라도 해 봐! 그래야 돈이 덜 아까울 것 아니냐!’
세리나가 서러워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이반이 왕성을 오가는 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귀족들이 전부 모여서 회의를 하는 날이라 아이반도 왕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에르긴도 오늘은 왕성에 들어갔다. 회의에 다섯 번 이상 참석하지 않으면 작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걸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에르긴이 빠질 리 없었다.
세리나가 초조한 얼굴로 자리를 서성였다.
왕성에서 나와 마차를 타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에르긴은 정 안 된다면 아이반과의 사이에 소문이라도 나면 된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자기가 어떻게 해 보겠다고.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왕성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귀족들이 쏟아져 나왔다. 왕성 내부로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여기까지 걸어 나와야 했다.
왕성 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부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태워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중에는 에르긴도 있었다. 에르긴은 세리나를 눈짓으로 일별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건 이왕 마음먹은 김에 잘해 보라는 응원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아이반이 나왔다. 세리나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이반에게 달려들었다. 워낙에 갑작스럽기도 했고 세리나에게서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던 터라 아이반은 세리나의 기습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나가 아이반을 끌어안았다.
“조, 조, 좋아해요!”
세리나가 목청껏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잘 들을 수 있도록.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건 숫제 비명과 같았다. 사람들이 다 보았다. 세리나와 아이반을 벙찐 얼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반은 침착하게 세리나를 밀어 냈다.
그러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제, 제 말을 들으셨잖아요.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세리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한 번도 남자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에르긴이 세리나를 푸대접하긴 하지만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남자들도 그랬다. 세리나에게서는 물에 젖은 처연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며 좋아해 줬다.
그런데 아이반은 지금 땅을 기는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세리나를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대하는 거지?’
이런 남자니까 미엘린을 때리는 거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남편이나 챙기십시오. 유부남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정신머리가 있으면.”
아이반이 불쾌하다는 듯이 옷을 털어 냈다. 이 정도라면 세리나가 어지러운 척 쓰러져도 경비대에 맡기고 떠나 버릴 것 같았다.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세리나의 입이 좋을 대로 떠들어 댔다.
“한 번이라도 저를 제대로 봐 주시면……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몰라요.”
“미친 겁니까? 더 이상 이야기 나눌 가치도 없군요.”
아이반이 짜증스럽게 웅얼거렸다. 세리나가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데 생각나는 건 미엘린뿐이다. 이 일을 알게 되면 불쾌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을 것 같았다.
‘정말 입맛이 떨어지네요.’
그런 말을 하면서,
‘그런 개소릴 들어 주고 있었어요?’
그리 말을 맺겠지.
아이반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마차에 올라탄 아이반이 마부에게 말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자네. 피해서 가도록.”
“예, 공작님.”
아이반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세리나만이 자리에 남겨졌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주변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보았다. 세리나가 아이반에게 안기는 것을.
에르긴이 바라는 대로 어느 정도 소문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미엘린은 거기서 나올 수 있게 될 거다. 미엘린을 구해 내는 것이다.
세리나가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에르긴에게 오늘의 성과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날은 유독 에르긴의 기분이 좋았다. 에르긴은 세리나의 침실을 찾았고 그녀를 안았다. 에르긴은 세리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작의 여자를 안는 느낌이군. 곧 소문이 그렇게 날 테니 말이야!’
* * *
아이반은 세리나와 있었던 일을 내게 다 털어놓았다. 인상을 찌푸리고는 “미친 게 확실합니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식사를 거르면 안 됩니다, 미엘린.”
“……입맛이 떨어지는군요. 후우. 그런 정신 나간 짓이라니.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걸까요?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나?”
내가 내려놓는 수저를 아이반이 안타까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왜 각자 인생 사는 게 안 될까요. 그냥 두 분 행복하셨던 대로 행복하시면 되는 건데.”
잔뜩 비꼬는 어투로 말을 던졌다.
아이반이 풀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불쾌합니까?”
“아주 많이요.”
“혹시…… 질투하는 겁니까?”
“그럼 안 되나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시무룩했던 강아지가 환히 웃었다.
“아니요, 됩니다. 질투 많이 해도 됩니다.”
“……목욕 3번 할 때까지 내 옆에 오지 말아요. 세리나랑 닿았잖아요.”
이번에는 환히 웃던 강아지가 도로 시무룩해졌다.
“……하루 만에 3번 목욕해도 됩니까?”
“그 정도는 봐줄게요.”
아이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정말로 불쾌하다. 그 여자랑 나는 전생에 무슨 악연이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세리나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식사를 깨작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반과 식사를 하는 건 대부분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세리나가 끼어들기만 하면 엉망이 되곤 했다.
으.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고개를 내저었다.
* * *
‘어제 난리가 있었다죠? 왕성 앞에서 사람들 다 보는데 세리나 백작 부인이 틸리언즈 공작을 끌어안았대요.’
‘어……? 예전에 그 말이 사실이었나. 그, 왜. 그 오묘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떠들어 댔던 거 있잖아요. 그것도 그 여자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두 번이나 이렇게 엮인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긴 한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요. 세상에. 공작 부인만 불쌍해서 어떡해요?’
‘친구에게 두 번이나 남편을 뺏기다니! 혹시 공작 부인에게 매력이 없는 건 아닐까요?’
‘쉿. 잘못 떠들고 다녔다가는 왕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조용히 합시다.’
그런 이야기들이 사교계에 오갔다. 왕성 앞의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던 데다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계속해서 얽힐 리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이라는 건 각색되기 나름인 법이라 자극적으로 날개 돋친 듯이 퍼져나갔다. 종내에는 아이반이 세리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미엘린과 이혼할 거라는 이야기까지 퍼졌다.
에르긴은 그걸 기다렸다.
“미엘린을 찾아가야겠군.”
에르긴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미엘린도 소문을 들었을 테니 이번에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리라. 에르긴이 콧노래를 부르며 공작 저로 향했다.
아이반이 헨리 왕에게 불려간 것을 확인한 이후였다.
에르긴이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려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에르긴은 미엘린과의 재혼은 물론 원하는 모든 걸 얻게 될 것이다. 돈과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신이 난 에르긴이 마부에게 팁을 쥐여 주고는 공작 가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대로 미엘린은 에르긴을 만나 주었다.
미엘린이 무표정하게 에르긴을 쳐다보았다.
“왜 찾아왔나요?”
에르긴이 피식 웃었다.
‘자존심 세우기는.’
그래도 이번에는 에르긴이 져 줄 생각이었다. 지금 속이 속이겠는가. 아이반이 세리나와 바람을 피웠는데. 벌써 두 번째로 남편을 빼앗기는 것이다. 당연히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에르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엘린. 나는 정말 이번 일에 대해서 상심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너뿐만 아니라 내게도 상처가 될 일이었지. 나는 우리가 이 아픔을 같이 추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
에르긴이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어머니랑 아버지께서도 널 기다리고 계셔. 네가 진짜 며느리라고 생각하시지. 세리나는 한 번도 며느리라고 생각하신 적이 없으시대.”
“그래서요?”
“아이반 공작과는 이혼하고 나와 재혼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