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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67화 (67/92)

67화

미엘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희망에 찬 에르긴에게는 청신호로 보였다. 미엘린이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준 거라고 말이다.

“물론, 그냥은 안 돼. 나도 네가 공작하고 결혼하는 걸 보고 많이 상처받았다고. 정말로 나를 두고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단 말이야.”

에르긴은 미엘린을 받아 주는 대신에 한 가지 요구를 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렇게 에르긴이 매달렸는데 미엘린은 차갑게 그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기도 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이건 다른 문제였다. 에르긴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반 공작이 하는 사업들의 기밀을 빼내 주면 돼. 그걸 가지고 오면 백작 부인 자리는 네 거야, 미엘린.”

가만히 에르긴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미엘린이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군. 너, 대가리에 총 맞았니?”

“뭐, 뭐?”

“어디서 이 씹다 버린 오징어처럼 생긴 게 들러붙어서……. 야, 내가 오늘 문 열어 준 건 경고하기 위해서야. 네 아내 간수 잘하라고! 우리 순진하고 착한 남편 꾀어내서 어떻게든 해 보려는 것 같은데 아이반은 나밖에 모르거든?”

미엘린이 테이블을 탕 치고 일어나서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아오, 열 받아. 내가 요새 너희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 어쩜 그렇게 뻔뻔하니? 네 부모? 솔직히 말해. 돈줄이 필요하다고. 이전처럼 못 누리니까 아쉽니? 네 아버지 승마 클럽에서 나왔다며? 하긴. 말이 한두 푼도 아니고 지금 백작 가 사정에 어떻게 유지하겠어?”

한 번 시작하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털어놔야만 속 시원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엘린이 이를 악물었다.

“속 보이는 짓 하지 마. 이것도 네가 꾸민 거지? 하는 짓 저열하기는. 그 대가리에서 나올 게 이딴 것밖에 없나 봐? 사랑? 웃기고 있네. 너는 내 돈을 사랑하는 거겠지! 왜? 가진 것 없는 세리나랑 결혼하고 나니까 내가 가진 게 커 보여? 야, 꿈도 꾸지 마. 너 같은 건 내 발끝에도 못 닿아. 어디서 거지 같은 게 구걸하러 와서…….”

미엘린이 벙찐 얼굴로 그녀를 보는 에르긴을 노려보았다. 에르긴과 단둘이 남는 것이 무서워 기사들에게 동행해 달라고 한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털어놓지 않았나.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내지 못했을 용기였다.

미엘린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좀 꺼져.”

기사들이 새빨개진 얼굴로 끅끅거렸다. 미엘린이 한 말이 속 시원하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하게 있는 에르긴이 웃겼다. 미엘린이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못 걷는 모양이니 친히 내쫓아 주게.”

“네, 부인!”

기사들이 에르긴을 둘러매고 나갔다. 마치 짐짝을 내다 버리는 듯한 태도였다.

* * *

아이반은 치를 필요가 없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대체 세리나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치욕을 안겨 주는 걸까.

“그렇게 결혼하겠다고 해서 시켜 줬으면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뭣, 바람?”

헨리는 이번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신명 나게 아이반을 놀려 대고 있었다. 비난하는 것 같은 어조였지만 싱글벙글 웃고 있어 신빙성이 없었다. 아마도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을 테니 세리나와 아이반이 아무 사이도 아님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놀리고 싶겠지.

아이반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세상에. 우리 왕가에 이렇게 치욕스러운 일이 벌어지다니. 이보게, 사촌. 아무리 내 사촌이라고 해도…….”

“헨리.”

“음?”

“전에 나는 자네가 뒤보레 남작 부인과 말도 안 되는 추문에 휩싸였을 때 자네를 지켰네.”

“큼!”

그런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왕비의 임신 초기였는데 샤를리앙 왕국에서 사절단이 왔다. 그런데 사절단에 속해 있었던 뒤보레 남작 부인이라는 여자가 헨리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 수가 하도 치밀하여 결국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졌는데 당시에 아이반이 그게 아님을 밝혀냈다.

전부 남작 부인의 술수라는 걸 말이다.

남작 부인은 처음부터 샤를리앙에서 간자로 심기 위해 보낸 거였다. 남작 부인을 헨리 왕의 정부로 만들어 왕성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술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랬는데 은혜를 이렇게 갚나? 함부로 인간을 돕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잘 알겠군.”

“이보게. 정말로 내가 그렇게 생각했겠나. 내가 바보도 아니고.”

“방금 바보처럼 보였네만.”

아이반이 신랄하게 말했다. 헨리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대체 에르긴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빤히 보이는군. 자기랑 똑같은 방법으로 자네를 이혼시키려고 하는 것 아닌가.”

아이반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참게. 언제까지 그러고 다니겠나.”

“후우. 아무튼, 오늘 왜 부른 거지?”

“아. 자금이 흐르고 있네.”

헨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 르웨긴에서 왔다는 남자의 말에 그렇게 속아 넘어갈 줄이야. 범죄자도 제 효용을 다 하긴 하는군.”

“그러게 말이네. 덕분에 자네는 두둑하게 챙기겠군.”

“그 늙은 능구렁이가 진짜로 속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늙은이 시야가 흐려진 모양이지?”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노백작이 속을 거라고는 사실 아이반도 생각하지 못했다. 의심하다가 돈을 투자하지 않을 거라고 봤다. 그런데 가장 큰 금액을 노백작이 움직인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노백작의 아들들이 도박으로 돈을 많이 날려 먹었다는군. 그 돈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투자처를 찾던 중에 에르긴이 보인 거겠지.”

“그럴 수 있겠어.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그것도 다 거짓이야.”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그간 정·재계를 주무르며 헨리의 머리를 아프게 하던 노백작도 이렇게 지나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공작 부인에게 혼나진 않았나?”

헨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3번 목욕하기 전에는 침실에 들지 말라더군.”

아이반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헨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결단력 있는 공작 부인답구먼.”

“재밌나?”

“물론.”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 사촌이라고 두고 있는 스스로가 불쌍하다.

헨리가 싱글벙글 웃다가 일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왕비의 출산이 임박했네. 아이가 3일 안으로 나올 듯하다는 게 의사들의 판단이야. 그런데 알다시피 왕비의 친정이 전멸했지 않나.”

“그래서?”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비밀리에 들어오기로 했네. 알다시피 가정복지부의 직책을 맡아서 왕비와의 친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중이거든.”

“다행히 잘 돌봐주시겠군.”

“혹 공작 부인도 입궁해 있을 수 있을까?”

“흠. 미엘린은 아직 출산 경험이 없네.”

왕비의 출산을 돕는 이들은 친정 식구들이나 출산 경험이 있는 귀부인들이었다. 미엘린은 거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알고 있네. 다만, 왕비가 공작 부인을 참 좋아하더군. 이야기 상대로라도 곁에 있어 준다면 정말 좋을 거야.”

“물어는 보겠네.”

“흠. 데이지가 슬퍼하려나. 공작 부인과 그렇게 잘 지낸다면서.”

“데이지가 프러포즈도 했네. 평생 같이 살아 달라고.”

아이반이 미소 지었다.

“약간 밀리는 기분이었지. 나는 아직 프러포즈도 못 하지 않았나.”

“세상에. 데이지가 그 정도였단 말이지! 데이지도 온다고 하면 들여보내도 좋네. 어차피 데이지도 평생 보고 살 아이 아닌가. 그 애가 공작 위를 물려받고 나면 모셔야 할 주군이 될 거야.”

“딸이든, 아들이든?”

헨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아이네. 그 애가 반드시 왕위를 이어받게 될 거네.”

아직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어 그런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 그러나 헨리는 요새 들어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곤 했다. 아이의 옷을 준비한다든가, 장난감 말을 준비한다든가.

직접 아기방 꾸미는 일에 관여한다든가.

“공작 부인에게 꼭 부탁 좀 해 보게. 어?”

“알았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엘린이 저택을 비운 며칠 동안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거다. 아이반이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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