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왕비 전하의 출산이요? 데이지도?”
“우웅?”
데이지에게 구연동화를 해 주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6살에게 출산이라는 단어는 어려울 수 있겠다 싶었다.
“아기가 나온대, 데이지. 데이지에게 동생이 생기는 거야.”
“우와! 동생이요!”
데이지가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답은 결정이 난 것 같았다.
“데이지도 갈래?”
더 이상 책을 읽는 건 무리일 듯해 덮어서 내려놓았다. 데이지가 방방 뛰었다.
“네! 데이지도 갈래요! 미엘린도 가요?”
“당연하지. 아이반,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왕비가 청한 도움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출산을 도와달라니. 이건 이 세계에서는 아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공작 부인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라는 거지.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데이지가 아닙니다.”
“그러게요. 데이지가 아닌데 걱정했네.”
내가 웃자 아무것도 모르는 데이지도 웃었다. 귀엽기도 하지. 데이지의 뺨을 살짝 꼬집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짐을 싸야겠네요. 로시에, 엔시.”
“예, 부인.”
“일주일 정도 지낼 짐을 챙겨 주면 될 것 같네.”
“예!”
로시에와 엔시가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다. 아이반이 데이지를 안아 올렸다.
“데이지. 일주일 동안 나를 못 보게 되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니?”
“우움……. 그러면 숙부님도 오시면 되죠! 숙부님은 못 가요?”
“숙부님은 아기가 태어나면 오실 거야, 데이지. 아이반, 혼자 있을 수 있다면서요.”
“큼.”
아이반이 멋쩍은 듯 웃고는 데이지의 뺨에 키스했다.
그나저나, 왕비의 출산이라. 거기에 가게 되다니 영광인데. 세리나도 이런 일에는 끼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왕비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후훗. 역시 이 언니의 매력을 알아보는군.
사실 왕비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하는 게 많은 편이었다. 왕비에게는 또래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비를 이용하려 드는 이는 많아도 친구로 지내려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왕비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나는 대단한 권력이나 그런 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아무튼. 출산이라니.
나 이런 일 처음이야.
조금 두렵고 설렜다.
* * *
헨리 왕은 나와 데이지, 그리고 아이반에게 성대한 석찬을 대접했다. 헨리는 이 은혜를 언젠가 꼭 갚겠다고 말했다. 그래, 꼭 갚아 줬으면 좋겠네.
아이반은 저녁을 먹고 저택으로 돌아갔고 나와 데이지만 남았다. 우리는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왕비를 만날 수 있었다.
“왕비 전하.”
“오랜만이에요, 공작 부인. 그리고 데이지.”
“왕비 전하, 안녕하세요!”
데이지가 깜찍하게 인사했다. 아직 작은 몸으로 궁중 예법을 소화하기에는 무리였는지 어설프기만 했다. 왕비가 팔을 뻗었다. 배 때문에 데이지를 안지는 못하고 손을 잡은 채로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우리 데이지도 오랜만이구나. 그간 잘 지냈어?”
“네! 왕비 전하랑 꼬마 동생은요?”
“우리는 잘 지냈단다. 자, 여기.”
왕비가 데이지의 손을 당겨서 배에 얹었다. 아기가 움직이는 게 손바닥 아래로 느껴진 모양인지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생이야, 데이지.”
“우와! 우와! 동생!”
데이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왕비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지. 동생은 여동생 같니, 남동생 같니?”
아이들은 통하는 게 있다던데. 나도 궁금해서 데이지를 보았다. 데이지가 골몰한 얼굴로 왕비의 배에 귀를 댔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이요! 데이지랑 같이 인형 놀이 할 거예요!”
“정말?”
“네!”
왕비가 환하게 웃었다.
“왕께서도 왕녀를 바라셨는데 잘됐구나.”
왕비가 데이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잘 놀아 줄 거지?”
“네! 데이지 잘할 수 있어요! 동생은 예뻐요.”
“지금은 네가 더 예쁘구나.”
왕비가 다시 한번 데이지의 이마에 키스했다. 데이지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예쁘다는 말 좋아하면서, 뭘. 피식 웃으면서 데이지를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몸은 편안하세요?”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아랫배가 뭉치는 것도 같고.”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들어오셨나요? 의사들은…….”
“의사들과 산파는 상주하고 있고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내일 밤 들어올 거예요. 백작 부인이 내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 주실 거예요.”
“그렇군요. 만약 많이 안 좋으시면…….”
“누구나 하는 말이고 나는 덕분에 많이 들은 말이에요.”
왕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방금 하려던 말을 사람들이 전부 돌아가며 했을 테니 말이다.
“데이지는 안 졸리니?”
“우움…….”
왕비의 질문에 데이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불안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혼자 자라고 할까 봐 겁이 나는 듯했다.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었으니 혼자 재우기는 무리일 것이다.
“우리 같이 잘 거야, 데이지.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요?”
“그래.”
그제야 데이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어린아이다.
“데이지, 졸리니?”
왕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 안 졸려요. 데이지, 더 있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데이지가 아가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건 어떻겠니?”
내 제안에 데이지가 눈을 반짝였다.
“제가요?”
“그래. 데이지도 나랑 책 읽는 거 연습했잖아. 어때?”
“음, 아기가 제가 잘 못 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데이지도 아직 어린데.”
“아기에게는 내가 말해 주마, 데이지. 데이지는 정말로 책을 잘 읽는다고.”
왕비의 말에 잠깐 고민하는 듯했던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아 대는 데이지를 엔시에게 넘겨주었다.
“가서 책을 골라 올 수 있도록 돕게. 데이지가 직접 책을 골라야 하네.”
“예, 부인.”
데이지가 침실에서 잠깐 나갔다.
엔시에게 어떤 책을 읽을지 재잘거리며 멀어지는 데이지를 보며 왕비가 말했다.
“아이가 많이 밝아졌군요. 힐리아 공작 부인이 죽고 나서 한동안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랬나요?”
“네. 아이반과 아돌프가 걱정이 많았어요.”
왕비가 쓰게 웃었다.
“아돌프가 그렇게 갑자기 심장 마비로 가지 않았다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죠. 아돌프까지 그렇게 되고 나서 데이지는 밥도 잘 안 먹고 웃지도 않고. 그나마 아이반이 있어서 점점 나아지긴 했는데 저렇게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었어요. 데이지 별명이 종달새인 건 아시나요?”
“네. 들었어요.”
왕비가 생긋 웃었다.
“아는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아이였죠. 힐리아는 데이지가 자신의 감정을 전부 표출할 수 있도록 가르쳤어요. 데이지는 그렇게 자라났죠. 잘 웃고 잘 울기도 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을 다 되찾은 것 같군요.”
“제가 한 건 없어요. 데이지가 예쁜 아이였던 거지요.”
“아니요. 아이반으로는 부족했을 거예요.”
왕비가 내 손을 붙들었다.
“나는 아주 미숙한 사람이에요.”
왕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태 보여 줬던 활발하고 귀여운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내가 아이를 잘 기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혼자 된 지 오래되어서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몰라요.”
숨이 막히는 것처럼 새파란 얼굴이었다. 왕비는 두려움에 질식당하려 하고 있었다. 왕비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누구나 하는 고민일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 건지.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길러야 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다.
“왕비 전하. 왕비 전하만 그러신 게 아니에요. 처음으로 부모가 되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누구나 무섭고 두렵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거잖아요. 실수투성이일 거고 완벽하지 못할 거예요.”
“미엘린…….”
“그래도 도와줄 사람들이 있잖아요. 국왕 전하도 계시고 리엔스터 백작 부인도 있고. 겁내지 마세요. 조금씩 배워 가시면 돼요. 저도 도울게요.”
“미엘린…….”
왕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