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더군요. 유모들도 많고 시녀들도 있을 텐데 괜한 걱정이라고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왠지 미엘린은 그렇게 말할 것 같지 않아서…….”
“그들이 있다고 한들 아이의 어머니는 왕비 전하이신걸요. 고민이 많으신 것, 이해해요.”
사실 도와주는 손이 많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전반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왕비였다. 심지어 그 유모를 고르는 이도 왕비였으니 두려운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이 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태어날 때가 다가오니까 괜한 생각이 들더군요.”
“다들 겪는 일일 거예요. 왕비 전하뿐만 아니라 다 처음은 있는 거니까요.”
“그런 거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엘린은 마치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저도 비슷할 것 같은데요.”
볼을 긁적였다.
“데이지가 어떻게 지냈고 무엇을 했는지 저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답을 알고 시작했는데 어렵지 않을 수밖에 없죠. 어려운 건 힐리아가 다 했어요.”
“그런가.”
“저는 그냥 남의 공을 그냥 주운 것과 같아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하니 부인이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데.”
왕비가 자꾸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시도했다. 그녀는 정말로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왕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데이지가 돌아왔다. 왕비는 데이지가 오고 나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데이지가 왕비의 옆자리에 앉아 통통 튀는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었다. 아직은 책을 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한 건 아니라서 떠듬떠듬 읽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아이가 읽을 수 있는 난도의 동화책을 가지고 왔다.
왕비는 숨을 죽인 채로 데이지가 책을 전부 읽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결국, 데이지가 책을 혼자 다 읽는 데 성공했다. 책을 다 읽은 데이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마치, ‘나 잘했어?’라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니 데이지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데이지. 정말 잘 읽는걸? 동생이 좋아할 거야. 고맙대.”
“정말요?”
“그럼!”
“그러면 데이지가 책을 읽어 줄게요!”
“정말로?”
“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데이지가 자신감이 붙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가 소파 밑에서 굴러떨어지듯이 내려와 내 품에 안겼다. 데이지를 꼭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했다.
“우리 데이지, 많이 컸네?”
“네! 내일은 이만큼 더 클 거예요!”
키를 말한 게 아니었는데. 데이지가 까치발을 번쩍 들었다. 왕비가 그런 데이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의 먹구름은 가신 얼굴이었다.
“왕비 전하.”
“음.”
“그렇게 웃으실 일이 더 많아질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차린 왕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자야지, 데이지?”
“네. 오늘은 데이지가 책 읽어 줄게요!”
“좋아. 책은 내가 골라도 돼?”
“음, 쉬운 거?”
“어려운 거?”
“아앙! 아직 안 되는데…….”
왕비에게 예를 갖추고 재잘거리는 데이지와 함께 우리에게 배정된 침실로 돌아왔다. 데이지가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데이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도 잠이 들었다. 아이가 언제 태어나려나.
* * *
에르긴이 욕설을 내뱉었다.
미엘린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에르긴 입장에서도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찾아간 거였는데 그렇게 매몰차고 예의 없게 대하다니.
에르긴이 분통이 올라와서 발을 굴렀다.
그 자리에서 미엘린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게 더 치욕스러웠다. 미엘린은 에르긴이 세리나를 보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미친 여자 아니냐고! 감히 남편 알기를 뭐로 알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미엘린이 네게 뭘 어쨌길래 이래.”
“어머니. 그 여자는 미쳤습니다!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는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제게 하신 말을 들어 보셨어야 해요!”
“그러면.”
대부인이 차갑게 에르긴의 말을 잘랐다.
“그러면 세리나를 계속 데리고 살 거니? 이 백작 가에 그 여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제 의무조차 잘 이행하지 못하는 아이야!”
손에 전권을 쥐고 아무것도 내놓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백작 부인은 그 모든 게 세리나 탓이라고 생각했다. 세리나가 잘만 했으면 그녀도 모든 걸 내려놓고 세리나에게 전권을 물려주지 않았겠느냐고.
세리나가 못하니 나이 먹은 스스로가 고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대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돈을 빼돌려 친정에 가져다주는 거밖에 없는 애야. 게다가 이번엔 공작과 추문에 휩싸였지. 차라리 그 추문을 밀어붙여서 그 계집애를 내쫓는 게 어떻겠니.”
“……어머니.”
에르긴이 끓는 목소리로 대부인을 불렀다.
“계획대로 미엘린을 데리고 와서 혼내 주면 되는 거 아니니. 그 애는 최소한 돈으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아. 이러다가는 크로세타 백작 가의 돈이 다 흘러나갈까 걱정이구나. 가뜩이나 지금도 많이…….”
대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네 아버지는 말을 팔고 승마 클럽에서 나왔다.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니. 그날 이후로 방에서 나오지도 않으시잖니. 고급 의상실에서는 나를 받아 주지도 않아. 이게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니?”
대부인이 옷을 살 돈도 없다고 에르긴을 설득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것도 아니라고. 차라리 영지로 내려가서 평생 나오지 않는 게 덜 창피할 듯하다고. 에르긴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다. 미엘린의 재산은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위자료로 모든 것을 토해 내면서 그 모든 탓을 패소한 변호사에게 돌렸다. 변호사는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누리는 것 모두 백작 부인의 돈 아니었습니까? 사실 저쪽에서는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 갈 수 있었습니다!’
모욕적인 발언이기는 했지만 모든 게 미엘린의 부 위에서 구축된 것들이기는 했다. 에르긴이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미엘린과 함께 가면 의상실의 모두가 나와 설설 기었다.
그리고 미엘린과 함께 승마 클럽에 가면 최고급 말들이 줄줄이 들어왔고 그중에서 낙점만 하면 되었다. 미엘린과 함께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았다.
에르긴이 입술을 질끈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미엘린의 버릇은 추후 고쳐 놓으면 되는 거지요.”
“그렇단다, 에르긴.”
대부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대체 신께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으셔서 착한 우리 아들을 괴롭히시는지. 분명 더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걸 거다.”
“네, 어머니.”
에르긴이 미엘린의 뒤를 다시 쫓았다. 한 번이라도 미엘린을 마주쳐서 그녀와 대화라도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미엘린을 다시 설득해 볼 테니까.
그게 미엘린에게는 어떤 공포가 될지 에르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 * *
아이가 태어났다.
산파들 말로는 초산치고는 수월한 편이라고들 했다. 아이는 데이지가 말한 대로 딸이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침실 안에 들어서 왕비의 손을 잡아 주었으며 나는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렸다. 데이지는 잠시 엔시가 홀로 돌보고 있었다.
아이의 유모로 선정된 이가 나와 무사히 왕녀가 태어났음을 알렸을 때 헨리 왕은 뜨거운 눈물을 터뜨렸다. 왕비가 진통을 앓는 내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더니.
“산모는, 왕비는 괜찮소?”
“기력이 없으시긴 하지만 괜찮으십니다.”
“왕비의 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예, 전하.”
“……아이는 어떤가? 누구를 닮았는가? 나? 왕비?”
“왕비 전하의 머리카락 색과 전하의 눈동자 색을 물려받으셨습니다.”
유모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왕실의 관습상 왕이 아이와 왕비를 만날 수 있는 건 3일 후였다. 헨리가 아쉬운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유모에게 아이에 관해서 묻고 또 물었다.
차라리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지, 왜.
왠지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헨리 옆에 섰다.
“나는 들어가도 되나?”
“예, 왕비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유유히 헨리를 스쳐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헨리 덕에 웃었다. 왕도 못하는 게 있구나. 왕이기에 더 왕실의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산실은 정리가 끝나 가고 있었는지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기진맥진한 왕비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옆에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앉아 왕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