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AW
“공작 부인. 이리로 오세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왕비가 눈을 슬며시 떴다. 왕비가 생긋 미소 지었다.
“……아기를 봤나요?”
“네. 건강한 왕녀님이시더군요.”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에 울 뻔했어요. 정말 내가 낳은 아이가 맞나 싶어서. 빨간 원숭이 같더군요. 다행히 리엔스터 백작 부인 말로는 원래 그렇대요. 갓 태어난 아기들은 머리 모양이 세모꼴일 수도 있고 원숭이 같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데이지처럼 예쁘게 자라겠죠?”
“당연한걸요.”
“그럼 됐어요.”
왕비의 말에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왕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마에 키스했다. 마치 딸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왕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의 곁에 가서 앉으니 아이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동그란 주먹을 움켜쥐고 잠든 아이를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
“아기는 정말 작군요……!”
“제가 작아서 더 작은 걸 수도 있어요.”
왕비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요. 평균으로 태어났어요.”
산파가 왕비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네. 물론이지요. 건강한 왕녀님이세요.”
그렇게 한담을 나누다가 왕비가 쉴 때가 되어 산실에서 나왔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도 밤새 곁을 지킨 탓에 이만 쉬어야겠다고 방으로 향했고 나도 데이지가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왔을 거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반이 침실에서 데이지와 잠들어 있었다.
“아이반?”
아이반이 부스스 눈을 떴다.
“아, 미엘린.”
아이반이 사르르 미소 지었다. 나를 향해 팔을 벌리는 아이반의 옆에 가서 앉았다. 품에 안기는 대신에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고작 일주일도 안 됐는걸요. 일찍 왔네요?”
“왕께서 닦달하셔서 사실은 어젯밤에 들어왔습니다. 전하를 대신해서 업무를 보고 있었죠.”
아이반이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기는 잘 태어났습니까?”
“네. 건강한 왕녀님이에요.”
“헨리가 기대한 대로 됐군요. 다행입니다.”
아이반이 나를 잡아당겨서 눕혔다. 나도 밤샌 건 마찬가지라 순순히 그 품에 안겨들었다. 데이지는 아이반의 등 뒤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반이 나를 향해 몸을 돌린 탓이었다.
나를 꼭 끌어안은 아이반이 이마에 키스했다.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태어난 아기를 보고 왕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피로였다.
“……보고 싶었어요.”
서서히 수마에 빠져드는 내게 아이반이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없는 공작 가는 너무 지루하고 조용하더군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반의 품 안에 고개를 기댔다. 아이반에게서는 종이와 잉크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내내 서류를 만졌다더니 그 탓인 듯했다.
“저도 그랬어요, 아이반.”
아이반에게 속삭였다.
“음?”
“보고 싶었어요.”
웅얼거리듯이 말하고는 푹 꺼지는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이반이 미엘린을 끌어안은 채로 어정쩡하게 굳었다. 미엘린은 모든 방어기제를 해제한 것처럼 아이반에게 속삭이고는 잠들어 버렸다. 미엘린에게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처음으로 미엘린이 자신의 모든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아이반이 미엘린을 꼭 끌어안은 채로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숙부님……?”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아이반이 몸을 바로 눕혔다. 그러자 미엘린이 보였는지 데이지가 고개를 들고는 배시시 웃는다.
“데이지. 동생이 태어났다는구나.”
“정말?”
“그래. 좀 더 자고 일어나면 볼 수 있을 거야.”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아이반의 옆구리에 몸을 붙이고는 잠이 들었다. 아이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게 바로 행복인가 싶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데이지도, 미엘린도 곁에 있었다.
아이반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지난 3일 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프러포즈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나름대로.
* * *
다음 날,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왕비와 헨리 왕, 그리고 리엔스터 백작 부인과 식사를 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데이지는 마차에서 오는 내내 아이반에게 자신이 얼마나 책을 잘 읽었는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가 동생에게 책을 읽어 줬다는 거지?”
“네!”
데이지가 짧은 손가락을 하나, 하나 꼽았다.
“다섯 권이나 읽어 줬어요! 이렇게 많이! 이렇게 잔뜩!”
데이지의 어휘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잔뜩이라는 단어는 또 언제부터 쓰게 된 건지. 아이반과 내가 동시에 웃었다.
“그랬어?”
“네! 왕비 전하가 아가 동생한테 책 읽어 주러 자주 놀러 오래요.”
“그거 됐구나, 데이지. 나는 데이지가 그렇게 책을 잘 읽는지 몰랐지 뭐니?”
“데이지도 어른이에요! 다 컸어요.”
데이지가 뿌듯하게 말했다. 아이반이 데이지를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그럼 더 어른이 되기 전에 자주 안아 줘야겠다. 어른이 되면 안아 주지 못하잖니.”
“어, 왜요?”
“어린이 되면 키도 이만큼 크고 무거워질 텐데?”
아이반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데이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꼼지락거렸다. 워낙 안기는 것도 좋아하고 매달리는 것도 좋아하는 데이지다.
그런 걸 못한다고 하니 고민이 되는 눈치였다.
“어, 음……. 어, 음……! 그럼 어른 안 할래요…….”
데이지가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면 매일 안아 줘야겠다.”
“정말요?”
“그럼. 아기는 이렇게 가벼운걸?”
아이반이 데이지를 안아 올렸다가 다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어리광을 피우며 안겨 드는 데이지를 아이반은 공작 저에 도착할 때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정말 보기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 * *
아이반이 준비한 프러포즈는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사실 스타티스와 머리를 맞대 봤자 나오는 아이디어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집사장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도움도 받았지만 그렇게 효용이 있지는 않았다.
결국, 스타티스와 아이반은 고전을 선택했다.
고전이 유구한 것은 이유가 있다면서.
이미 유명한 레스토랑의 좋은 자리는 한 달 이상 예약이 차 있었던 터라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 결국, 아이반이 어릴 적부터 교류하고 지냈던 첼로타 백작이 자신의 몫을 양보해 주었다. 그 대신에 엄청난 놀림을 감수해야 했다.
‘이제야 프러포즈를? 이야, 평생 약점 잡히겠구먼. 자네도 느려 터져서는.’
‘소박맞으면 꼭 내 저택으로 오게.’
그러면서 한참 놀려먹다가 첼로타 백작 부인에게 등짝을 얻어맞고는 끌려갔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이반은 좀 더 오랫동안 먹잇감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첼로타 백작은 다음에 다 함께 보자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반지를 준비했다.
프러포즈용 반지는 따로 준비해야 한다나. 모든 보석상을 다 뒤져서 가장 좋은 거로 골랐다. 손가락 사이즈는 다행히 로시에로부터 협조받아 알아낼 수 있었다.
‘어머.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이렇게 낭만적이라니……. 공작님이 이런 분이신 줄 몰랐어요. 아, 물론! 공작 부인께는 비밀로 할게요, 쉿!’
아이반은 불안불안한 마음을 참아야 했다. 로시에의 흥분한 얼굴을 보아서는 당장이라도 미엘린에게 달려가서 말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비밀이 지켜지고 있었다.
로시에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빼면 말이다. 그건 분명, ‘비밀은 지켜지고 있다’라는 신호였다.
그렇게 장소와 반지가 준비되었으니 다음은 꽃다발이었다. 그냥 다들 하는 장미를 준비할까 했는데 미엘린이 좋아하는 꽃이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크리스티나에게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흠. 미엘린은 대부분의 꽃을 좋아하지만, 해바라기를 정말 좋아해요. 지금 날씨도 딱이네요. 해바라기가 아직 화원에 남아 있을 거예요. 아, 해바라기가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해바라기의 꽃말처럼 사셨으면 좋겠어요. 요새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한참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하필 세리나와 그런 소문이 나게 두었냐’부터 시작해서 ‘대체 그 여자랑 무슨 일로 엮이게 된 건지’ 등등. 때문에 앞으로는 그 여자와 상종도 안 하겠다는 말을 무수히 반복해야 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크리스티나는 그 저택 후원에 아이반을 묻어 버릴 눈치였다. 그녀의 응접실에는 기사 여럿이 서 있었으니까.
아이반이 급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고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미엘린이 좋아해야 할 텐데.”
“좋아하실 겁니다. 공작 부인은 준비한 마음을 더 예쁘게 봐 주실 분이시잖아요.”
“그런가?”
“제가 본 공작 부인은 그렇습니다.”
스타티스가 아이반의 불안을 잠재워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아이반은 곧 결혼하는 새신랑처럼 굴고 있었다. 이미 꿀 떨어지는 신혼을 즐기고 있으면서.
오늘 아이반은 오랜만에 꾸무적거리며 늦잠을 잤다. 아침 식사가 공작 부인 침실로 갔다는 이야기는 스타티스도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렇게 꿀 떨어지는 사이에 프러포즈를 고민하다니. 그냥 길바닥에서 무릎 꿇고 반지를 내밀어도 미엘린은 기쁜 얼굴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고.”
아이반이 가슴 위를 쓸어내렸다.
자신에게 괜찮다고 주문도 걸어 보았다.
“그러면 미엘린이 준비가 다 되었는지 가 봐야겠군.”
스타티스가 아이반에게 무운을 빌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