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왕비가 왕녀를 무사히 출산했다는 소식이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거리는 기쁨으로 휩싸였다. 헨리 왕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사유 재산으로 쌀을 사들였다. 이곳에서는 밀보다 쌀이 더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전국적으로 배포하여 왕국민들이 나눠 먹게 하니 다들 기쁠 수밖에 없었다. 왕녀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이틀간의 휴일이 제정되었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한국에서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이런 이벤트가 있었다면 직장인으로서 얼마나 기뻤을까?
아무튼, 어딜 가나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한 가운데 나와 크리스티나가 만났다.
“외출을 다 하고. 웬일이래?”
“왕녀 전하 탄생을 기념해서 자선 모금 연회를 한 번 더 여신다잖아. 그걸 준비해야지.”
“아아.”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어떤 콘셉트로 해 볼까?”
“그 전에. 프러포즈 받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세리나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린 거 알아?”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들 하던데.”
피식 웃었다.
아이반이 내게 프러포즈했던 레스토랑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세리나와 아이반을 함께 입에 담지 않는다. 프러포즈에 대해서 떠들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이반 혼자는 못 했을 거야.”
“이 정도로 뭘.”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연회 이야기 해도 돼?”
“물론.”
“콘셉트를 생각해 봤는데 약간 브런치 같은 느낌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
“브런치?”
“응. 업체를 정해서 물건들을 납품을 받는 방법을 생각해 봤어. 업체들끼리 경쟁하게 하는 거지. 가장 좋은 차, 가장 좋은 식자재, 가장 좋은 커튼.”
“경쟁을 붙이자고? 무슨 의미로?”
“자선 모금 연회는 어려운 이들만 돕는 거잖아. 그리고 여기 이 거리의 노점상들도 근근하게 일하고 있잖아. 저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 봤어. 최고급 의상실, 최고급 살롱. 이런 데서만 물건을 가져올 게 아니라 그런 방법을 쓰면 어떨까 해서.”
“상권을 살리겠다는 거지?”
“응. 이 차를 마셔 봐.”
크리스티나가 오묘한 시선으로 찻잔을 보았다. 내 권유로 그것을 마시면서도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귀족들이 평소 다니는 고급 살롱이 아니라 일반 찻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모금 마신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건……!”
“로시에의 추천을 받았어. 정말 차가 맛있다더라고. 이 마들렌도 기가 막히지.”
크리스티나도 먹어 보고는 동의했다.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곳에도 좋은 것이 많단 말이야. 왕실에서 먼저 솔선수범하면 다른 이들도 따라올 거야. 어떤 업체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체가 참여했느냐도 이슈가 되겠지.”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구나?”
“그래.”
“그러면 귀족들이 경쟁 붙을 만도 하군.”
“고급 살롱에서도 경쟁에 참여해서 최고점을 받으면 물건을 납품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네. 모두에게 공정해지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참 동안 이 일에 대해서 크리스티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비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고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헨리 왕을 위한 충신이라는 말도 들었다.
내치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헨리의 정치 방향과도 맞는다고.
덕분에 왕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일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건물은 거의 보수가 끝나가는 것 같은데.”
“아.”
내 이름을 건 최고급 살롱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모레야, 크리스.”
“뭐?”
“그리고 왕비께서는 저기에서 연회를 여는 걸 동의하셨지.”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연회를 할 만한 홀은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위층 객실을 빼고는 전부 개방할 생각이거든. 구경도 하고 자선 모금도 하고 하는 거지.”
“저기 물건들도 전부 경쟁을 붙여서 입찰한 거야?”
“맞아.”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네가 나보다 더 노련한 사업가 같은걸.”
“어머. 몰랐어? 나는 원래 뭐든 잘해.”
“세상에, 미엘린…….”
“아무튼, 그래서…….”
창밖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가고 있는데 익숙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에르긴?
또 여긴 왜 있어. 전에 레스토랑 다녀올 때도 느꼈고 오늘 마차를 타고 나올 때도. 이 찻집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소름이 쫙 돋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따라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 표정……. 저 새끼가 왜 자꾸 네 주변에서 보이는 거지?”
“……몰라.”
“미친 거 아니야?”
크리스티나가 이를 악물었다.
내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그냥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거라 신고도 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에르긴 또한 귀족이기 때문에 금방 풀려날 것이 분명했다. 침을 삼켰다.
“미엘린, 괜찮아?”
“어, 응.”
“한동안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이 일은 내가 준비해 볼 테니까……. 연회는 일주일 후지?”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저택에서 나오지 마. 거기에 저놈이 어떻게 들어가겠어. 그리고 왕성에 오갈 때는 반드시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는…… 내가 널 만나러 갈게.”
“고마워.”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놀란 나를 부축해서 찻집 밖으로 데리고 나온 크리스티나가 마차를 불렀다.
인체스터 가문의 마차였다.
크리스티나는 고맙게도 나를 저택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 끈질긴 에르긴.
이를 아득 갈았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그놈의 목숨을 연명시키고 있었다. 얼른 거기서 빼내야 하는데. 나는 울분에 차서 아이반을 찾아갔다.
“언제 드래곤 클럽이 망하는 거죠? 가이스는요? 왜, 왜 그 남자가 살아 있는 거죠?”
“미엘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이반이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니 인지하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얼굴을 뒤덮은 눈물을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누가 대체 당신을…….”
“무서워요, 아이반…….”
에르긴이 법정 앞에서처럼 내게 폭력을 행사할 것 같았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아프게 할 것 같았다. 아무도 거기서 나를 구해 주지 못하는 거다.
이유 없는 고통이 몰려드는 듯했다.
그 순간의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미엘린!”
아이반이 쓰러지는 나를 붙들었다. 아이반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 품에 안도해서 정신을 놓았다.
* *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고하게.”
미엘린과 함께 나갔던 호위 기사를 닦달하는 아이반의 얼굴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공작 가의 마차는 혼자 돌아왔다. 미엘린이 크리스티나의 마차를 타고 돌아온 덕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기사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다고 말할 만한 문제가 있었다기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엘린이 대체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지?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기사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떠올리기에도 미엘린은 저택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저 자꾸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작 부인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쫓아오는 사람?”
아이반이 무슨 일을 칠까 봐 두려워 쫓아 나왔던 스타티스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혹 크로세타 백작이…….”
빌어먹을. 아이반이 욕설을 짓씹었다. 이제야 마음을 열고 아이반에게 진심을 보여 주게 된 미엘린이다. 그런데 또 에르긴이 끼어들어서 초를 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혹 그런 낌새는 없었나?”
“죄송합니다, 공작님! 귀족 복색을 한 자가 맴돌긴 했는데 귀족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귀족이, 그것도 백작쯤 되는 이가 누군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기사가 예상도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들은 하지 않는 기행을 일삼고 있는 것은 에르긴이었고. 사람이 어쩜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지.
“……다시는 그자의 접근을 허용치 말게. 스타티스. 미엘린 주변의 경계를 강화해야 하네.”
“예, 공작님.”
아마 이건 의도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레스토랑에서부터 오늘까지. 미엘린이 밖으로 나오는 날만 골라서 주변을 맴돌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이반이 이를 까득 물었다.
죽여 달라는 그 말이 그렇게 간절하게 들릴 수 있는 건가. 누가 들으면 잔인하다고 할 만한 그 말이 그토록 아프게 들릴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