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에르긴은 미엘린에게 상처인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미엘린은 에르긴이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굴었지만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미엘린은 머리 위로 손이 올라오는 것을 무서워한다. 태연한 척하지만,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악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꽤 심각하다는 이야기고. 미엘린에게 그런 상처를 준 건 에르긴이었다. 법정 앞에서의 사건은 그럴 만도 했다.
아이반이 머리를 헝클였다.
그날, 미엘린을 지키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을 것이다. 설사 법을 어기고 에르긴을 사사로이 죽여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전하? 절대로 나쁜 마음을 먹으시면 안 됩니다.
아이반이 흠칫해서 스타티스를 돌아보았다. 스타티스는 아이반의 속마음을 전부 다 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타티스가 고개를 저었다.
“데이지 아가씨와 공작 부인을 생각하셔야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스타티스가 말끝을 올렸다.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네. 참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공작님이 무결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해쳐 본 적도 있네.”
“기사로 재직하셨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혼자가 아니시니 절대로 사사로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스타티스가 못을 박았다.
“지킬 분들이 있으시니까요. 공작님이 감옥에 가시면 누가 그분들을 지켜 드립니까? 왕국의 귀족을 해치면 아무리 왕이시라도 전하를 비호하진 못할 겁니다.”
“……알고 있네.”
결국, 대답을 받아 낸 스타티스가 미소 지었다.
“예, 믿겠습니다.”
아이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티스의 말이 옳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에르긴을 살해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속히 그의 백작 위를 박탈할 수 있도록 지금 진행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르웨긴의 사내는 어떻게 되었지?”
“이미 거액의 투자금을 뜯어낸 거로 압니다. 노백작이 움직였으니 추종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왕께서 만족하실 정도일 겁니다.”
“그자를…… 데리고 오게.”
“예, 전하.”
스타티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 * *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에르긴에게 붙들려 가서 크로세타에 감금됐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안전한 공작 가에 있었다. 그것도 내 침실.
고개를 돌리니 아이반과 데이지가 보였다. 데이지가 나와 아이반 사이에 끼어서 잠들어 있었다. 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긴 머리를 할 거라면서 기르고 있는 소중한 머리였다. 내가 머리를 쓸어내리니 아이가 눈을 깜박이다 미소 짓고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데이지를 꼭 끌어안고 아이반을 쳐다보았다. 아이반의 긴 속눈썹이 볼 위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제 얼마나 놀랐을까? 나도 그렇게 발작적으로 감정이 올라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르긴과의 일은 내게 잊히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반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이반이 내 손을 붙들었다.
“아이반…….”
갈라진 목소리로 아이반을 부르니 느리게 눈을 뜬다.
“좀 더 자요.”
아이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좀 더 자.”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 그리고 따뜻하고 안전한 내 가족의 품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반이 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거뒀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내가 당신을 지킬 거예요.”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아이반은 여태 위험한 순간에서 나를 구했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이반이 내 뺨에 키스했다.
나는 마법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아주 편안하고 달콤한 잠이었다.
* * *
에르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르웨긴 놈이 연락이 안 된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틀 전부터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보좌관이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에르긴은 천하태평이었다.
“괜찮을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모든 게 잘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이틀 연락 안 되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이번에 자선 모금 연회에 들어갈 찻잎 입찰에 참여해야 했다. 이건 에르긴이 하는 살롱을 홍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번 자선 모금 연회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도 참석하기로 했다. 미엘린이 여는 살롱에서 한다던데. 그건 참 애석한 부분이었다. 에르긴의 살롱도 좋은 곳인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엘린이 자신의 살롱에서 사용하는 차를 사용하지 않고 입찰을 받기로 한 거였다. 그렇다면 에르긴 살롱을 눈도장 찍어 줄 수 있었다.
대신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에게는 살롱 위층에 있는 호텔이 제공된다고 했다. 역시 미엘린의 자본력이란. 이제 막 연 살롱에서 자선 모금 연회 같은 걸 한다는 것은 미엘린과 왕비 사이의 커넥션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이야기였다.
‘잘됐지. 다음에 미엘린에게 얘기해서 왕비에게 내 살롱을 이야기해 보라고 해야겠군.’
재혼하고 나면 그 정도가 뭐가 어렵겠는가. 부부 사이에. 아무리 에르긴이 미워도 이번 입찰에서도 그의 차를 골라 줄 확률이 높았다. 미엘린도 에르긴의 차를 좋아했으니까.
‘당신이 우려 준 차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에르긴.’
‘그럼. 많이 연구했어요. 차를 우릴 줄 알아야 좋은 살롱을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시간도 있었는데…….
에르긴이 좋았던 기억을 곱씹어 보고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세리나는?”
“자선 모금 연회에 갈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
그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약을 준비해서 아이반의 잔에 탈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아이반과 세리나가 옷을 벗고 있는 상황을 연출해 사람들이 보게 할 예정이다.
그 정도면 미엘린도 아이반을 포기할 것이다.
* * *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는다. 모든 악몽에는 끝이 있었고 언젠가는 에르긴의 일도 잊힐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제발 내게 되새김질해 주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왜 자꾸 내 인생에 끼어들려고 하는 건지.
기분 좋은 외출을 엉망으로 만든 에르긴에게는 원망이, 나로 인해서 놀랐을 아이반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에르긴만 아니었다면 그날도 완벽한 하루였을 것이다. 요새 항상 그러했듯이.
아이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나는 그가 나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매 순간 내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내게 온 신경을 집중한 것은 데이지도 마찬가지였다. 데이지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미엘린.”
“응?”
“숙부님이 그러셨어요. 미엘린 마음이 아프다고.”
데이지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팔걸이에 매달려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마음이 아픈 건 어디가 아픈 거예요?”
“글쎄. 여기?”
심장 위를 가리켰다.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이 아프면 큰일 난 거랬는데! 그러면 어떡해요? 미엘린, 그렇게 많이 아픈 줄 몰랐어요.”
울먹이며 내 무릎 위로 올라온 데이지가 가슴에 대고 호오, 호오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로시에와 엔시가 웃음을 꾹 참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데이지는 심각한데 여기서 우리가 웃어 버리면 분명 실례일 것이다. 나도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금세 잊히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아파요? 호오…….”
“이제 안 아파, 데이지. 정말로 하나도 안 아파. 데이지가 ‘호’ 해 주니까 마음을 갉아먹던 벌레들이 날아갔나 봐.”
“정말?”
“그럼, 정말.”
데이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면 안 돼요, 미엘린.”
코를 훌쩍이는 데이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데이지의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가 눈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약속할게.”
데이지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데이지가 있어서 배는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데이지가 칭얼거리며 내게 몇 번이고 약속을 받아 냈다. 데이지를 달래고 나니 아침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데이지는 엔시의 손을 잡고 다시 세수를 하러 갔다.
“데이지는 어쩜 그렇게 귀여울까?”
“데이지 아가씨야, 뭐.……. 그런데 이젠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정말이야.”
그제야 로시에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에르긴 따위 때문에 이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로시에에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 치료사에게 상담을 받아 보는 게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