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심리 치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좋은 생각이세요, 부인.”
로시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씀 않으셔서…… 괜찮다고만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로시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내 덕에 꽤나 마음고생을 한 듯했다. 미안하게도. 사실 심리 치료를 전생에서도 권고받았다. 나를 담당했던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던 사항인데 당시에는 어떤 여유도 없어서 도저히 그럴 여력이 나지 않았다. 내가 믿고 사랑할 이들이 사라져 버렸는데 더 이상 내게 무슨 희망이 있나 싶었다. 민주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어리석었다, 내가.
그러나 여기에 와서는 달라졌다.
내게는 크리스티나도 있었고 데이지와 아이반도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제처럼 갑자기 무너져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법정 앞에서 있었던 일과 그간 내 속에 쌓여 있었던 수많은 감정이 나를 한계로 몰고 간 것 같았다.
씁쓸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심리 치료를 받아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로시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일, 내일 심리 치료사님께 연락을 드려 봐도 될까요?”
“좋은 생각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부인. 그런 일을 겪고도 정말로 괜찮은 사람은 없어요……. 소문으로 들었지만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죠. 그런데 부인은 항상 모든 게 괜찮다고만 하시니까……. 크로세타 백작이 여길 찾아왔을 때도 그렇고 세리나 백작 부인이 찾아왔을 때도 그러셨어요. 그게 어떻게 괜찮아요?”
“괜찮은 줄 알았지.”
그들은 내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다고, 모든 걸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오만이었다. 애써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내가 정말로 그들로 인한 상처를 극복했더라면 어제와 같은 일은 없었으리라.
“공작님과 주치의와 상의 후에 치료사를 부르도록 할게요.”
“고마워, 로시에.”
로시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어 보니 마음이 조급한 것 같았다. 그만큼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리겠지. 저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괜찮아지고 말 거다. 이 삶을 내게 선물해 준 미엘린과 여기까지 버텨 온 나 자신을 위해서.
* * *
“부인께서 심리 치료를 자처하셨습니다.”
울먹이는 로시에의 말에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반이 몸을 일으켰다. 책상을 짚고 선 아이반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게 정말인가?”
“예, 공작님.”
아이반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몇 번이고 미엘린에게 권하고 싶었지만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는데 미엘린이 먼저 말해 준 것이다. 아이반이 안도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미엘린을 보는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실상 그런 일을 겪고도 내내 멀쩡하다는 게 이상한 거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미엘린의 트라우마는 몸을 웅크린 채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어제 미엘린을 진료한 주치의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참고 있었던 것들이 폭발한 듯하다고.
에르긴이 미엘린을 은밀하게 쫓아다닌 짓거리는 그것들을 터뜨리게 하는 트리거가 된 것이다.
“……주치의와 논의해서 가장 좋은 분으로 모셔 오도록 하게.”
“예, 공작님!”
로시에가 집무실에서 나가자 스타티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사교계에 소문이 나면 평판이 좋지 않을 겁니다. 공작 부인께서 그런 것에 연연하시는 분은 아니긴 하나,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어요.”
“그게 항상 문제가 되는 법이지. 피해자를 다시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니. 걱정하지 말게. 왕비 전하께 이 일을 부탁드려 볼 생각이니.”
아이반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일의 근원이 된 에르긴과 세리나를 치워 버리는 거다. 끝도 없이 미엘린을 괴롭히고 있는 원흉들!
* * *
아이반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부분 왕성에 와서 헨리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웬일인지 왕비를 찾아온 것이다. 아기를 보고 있던 왕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로 나를 다 찾아왔습니까?”
아이반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 미엘린이 치료를 받게 됐습니다. 심리 치료요.”
“좋은 일입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이 트여 있는 왕비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반이 쓰게 미소 지었다.
“저도 좋은 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일로 인해서 사교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입니다. 그건 또 다른 상처가 될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왕비 또한 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 제가 먼저 치료사를 부르는 거로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헨리도 상담을 받게 할게요.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지나쳐 왔잖아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일 거예요.”
“……반향이 클 겁니다.”
왕비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히 통치 잘하고 있는 왕을 내쫓을 건가요?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과거의 일로 왕족은 씨가 말랐는데 되겠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공작 부인의 일은 내가 덮을 수 있어요.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왕비가 쓰게 웃으며 어린 왕녀를 유모의 품에 안겨 주었다.
“유모. 헨리가 왕녀를 보고 싶어 안달일 거야. 가서 보여 주고 오게. 지금쯤 집무실에 있을 걸세.”
“예, 왕비 전하.”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유모가 왕녀를 안은 채로 응접실에서 나갔다. 시녀들이 그 뒤를 쫓았다. 아이반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왕비가 입을 열었다.
“아이반. 헨리도, 나도 그렇게 괜찮지는 않아요.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지.”
“왕비 전하…….”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우리는 아픈 과거를 지나쳐 왔죠. 헨리는 아직도 손이 피로 물드는 꿈을 꾼다고 해요. 새벽에 종종 악몽으로 벌떡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리고 헨리가 죽인 이복형제들이 그를 죽일 거라고 중얼거려요.”
아이반의 얼굴이 흐려졌다.
헨리의 밝은 겉면으로는 알 수 없는 속 이야기였다. 아이반에게는 아돌프의 죽음이 과한 책임감으로 남았다. 아돌프가 하던 것들을 절대로 망가뜨릴 수 없다는 강박 관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것과 비슷하게 왕과 왕비에게도 상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모두 참고만 살 필요는 없지요.”
왕비가 사회적 분위기 개혁을 선언했다.
* * *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은 왕비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비는 나만큼이나 말만큼 행동력도 빠른 사람이었다. 아이반이 왕성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심리 치료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이 돌았다.
사실 귀족들이라고 해서 속 끓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남몰래 치료를 받는 이들도 있었고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 이들도 있었다. 왕비는 살롱을 열고 믿을 만한 이들만 초청했다.
그 자리에는 나도 초대받았다.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모였어요.”
왕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 왕비가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아는 귀부인들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리 치료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시녀장?”
“예, 왕비 전하. 들라 하겠습니다.”
시녀장의 손짓에 시녀들이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자가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나와 왕비의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이게 나를 위해서 아이반이 벌인 판이라는 것을 크리스티나도 알고 있었다. 그날, 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크리스티나도 곁에 있었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먼저 몇 가지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할 것 같아요. 코르넬 씨?”
“네, 왕비 전하.”
“심리 치료가 미치광이들만 받는 건가요?”
“아닙니다. 마음을 다친 분들도 받는 겁니다. 넘어지면 무릎을 다치고 치료받듯이 같은 겁니다. 모두 한 번쯤은 넘어지기 마련이잖습니까? 넘어진 상처가 곪지 않도록 제가 돌봐 드리는 거예요.”
코르넬이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르넬은 향기를 이용해서 심리 치료를 돕는 사람이었다.
귀부인들이 술렁였다. 왕비가 망설이는 사람들 앞에서 미소 지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이 오갔다. 왕비가 5개 넘는 질문을 던지니 귀부인들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한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왕비는 가장 먼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두려움과 고통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