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는 이 자리를 지키고 헨리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걸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너무 잔인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쌓이다 보면 자는 게 힘들어지더군요. 임신 전까지는 수면제를 항시 복용했답니다.”
왕비의 고백에 살롱 내부가 숙연해졌다.
코르넬은 가지고 온 가방 속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두었다. 금세 살롱 내부에 은은하고 차분한 향이 가득해졌다. 코르넬은 왕비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비는 코르넬과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왕비는 한결 더 가벼운 표정이 되었다.
“다음에도 또 왕비궁에 찾아와 줬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자. 그다음은…… 공작 부인.”
“네, 왕비 전하.”
“그대가 나 다음으로 해 보는 건 어때요?”
왕비가 생긋 미소 지었다. 당연히 거절할 리 없었다.
* * *
‘직접 해 봐야 알아요. 정말 속이 시원해진다니까요. 내가 요새 속을 좀 썩었잖아요. 가문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힘들었는데…… 지금도 그런데…… 뭔가 괜찮아졌어요.’
‘왕비 전하도 치료를 받고 우시더라니까요? 이게 절대로 나쁜 게 아니에요. 마음의 체증이 싹 가셔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다시 치료를 받고 싶다고 예약을 했다니까요?’
‘그 정도란 말이에요? 나도 받아 보고 싶네. 요새 아들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요. 마음이 꽉 막힌 것 같더라고요.’
‘행복해 보이던 공작 부인도 안쓰럽던 거 있죠. 법정 앞에서 있었던 사건 있잖아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더라고요!’
들리는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크리스티나와 차를 마셨다. 오늘 온 곳은 보안이 철저한 고급 커피 하우스였다. 밖에는 인체스터와 공작 가의 기사들이 흉흉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만약에 에르긴이 가까워지는 낌새라도 보인다면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외출을 나온 것은 심리 치료사의 권유에 따라서였다.
에르긴으로 인해서 내 인생을 놓지 말라나.
“크리스. 그래서 이번 콘셉트에 맞게 준비는 되어 가고 있는 거야?”
“그럼.”
“그동안 미뤄 둬서 미안해.”
“전혀. 너는 이제 괜찮아진 거야?”
“많이 괜찮아졌어.”
발작을 일으키고 처음에는 외출하는 것도 힘들었다. 왕비궁으로 가는 길이 천 미터도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크리스티나가 직접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나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다행이네.”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멈칫거리다가 내 손을 토닥였다.
“걱정시키기만 해서 미안…….”
“괜찮아. 이게 다 그놈 때문인걸. 후우. 신은 뭐 하시나 모르겠네. 그놈 안 잡아가고. 그런 주제에 유서 깊은 귀족 가에서 태어나다니. 대단한 복이야.”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누가 귀족이 스토킹을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큼. 미엘린. 이왕 한 김에 끝을 봤으면 어떨까 해서. 이번 자선 모임 테마를 심리 치료로 잡는 건 어떨까. 코르넬 씨를 초대하는 거지.”
“좋은 생각이야. 왕비 전하께서도 동의하실 것 같은데.”
“신기해서라도 들러 보는 귀족들이 있을 거라고. 자리는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해 두고.”
“그다음은 코르넬 씨에게 맡겨야지.”
“그 외에도 차하고 커튼 같은 건 업체 선정이 끝났어.”
“고생했어, 크리스…….”
“그러면 오늘 여기는 네가 사던가.”
“당연하지!”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선정된 업체는 전부 처음 들어 보는 곳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괜찮으면 미엘린 살롱으로 들어오는 업체들도 바꿔 봐야겠어.”
“그것도 괜찮지. 아. 이번 연회에는 크로세타 백작은 못 오게 할 생각인데.”
“아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의 배려는 고맙지만, 이번 연회에 크로세타의 부부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나와 아이반을 번갈아 가면서 괴롭히고 있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분명 무슨 수를 쓸 거란 말이야.”
“그래서?”
“갚아 줘야지. 크리스, 그 일로 의논할 게 있어.”
“나는…… 당연히 네 뜻에 따르겠어.”
크리스티나가 눈을 반짝였다. 내 계획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손뼉을 쳤다. 사실 얼마 전에 크로세타 백작 가에서 일하는 하녀 한 명을 돈으로 매수했다. 듣기로는 크로세타 백작 가에서 요새 봉급이 잘 안 나온다고 하더니 미끼를 무는 게 빨랐다. 덕분에 요새 에르긴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더럽고 비열한 수에는 똑같이 대응해 줘야 하는 법.
에르긴은 계획한 대로 돌려받아야 한다.
“가이스도 초대해 줘.”
“좋아.”
받는 만큼은 돌려줘야 속이 시원하지 않겠어? 어떻게 그런 비열한 수를 쓸 생각을 다 했담.
* * *
“아니. 대체 뭘 저렇게 꽁꽁 막고 난리야?”
에르긴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미엘린이 오늘도 외출했다는 말에 달려 나왔는데 그 근처로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만나는 걸 막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에르긴이 커피 하우스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곳에도 빈틈은 없었다. 인체스터와 공작 가의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본디 고급 커피 하우스라 신분이 확인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터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르긴이 괜한 돌을 걷어찼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또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인 기세로 발을 구르던 에르긴 옆으로 마차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틸리언즈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였다. 스치듯이 본 마차 안에는 아이반이 타고 있었다. 본디 에르긴이 즐겨 입던 고급 정장을 입고 값비싼 물건들을 두르고.
저게 다 미엘린이 해 준 것일 테다.
미엘린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전부 내놓고 있겠지.
“내가 가르쳐 줘야 하는데.”
에르긴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엘린이 모든 걸 다 빼앗기기 전에 말이다. 이번 자선 모금 연회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반의 더러운 내면을 밝히고 미엘린을 되찾아 오는 거다. 예전, 세리나의 생일 연회가 터닝 포인트가 되었듯이!
* * *
크리스티나와 약속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데 익숙한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반?”
“미엘린, 이제 끝났어요?”
“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어요?”
“아. 왕성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미엘린이 여기에 있다고 해서요.”
“나는 이만 가 봐야겠네.”
크리스티나가 나와 아이반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떠났다.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데리러 왔어요, 미엘린. 혹시 제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가요?”
“아니요. 돌아가려던 중이었어요. 그새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가.”
장난스러운 내 말에 아이반의 귀가 빨개졌다. 고개를 돌리고 큼큼거리는 아이반의 손을 흔들었다.
“네? 그래서 온 거예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시선을 따라 빙글 돌았다. 결국, 아이반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반이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렇게 꿀 떨어질 일이니. 까치발을 해서 아이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좋아요. 같이 돌아가요.”
* * *
아이반은 넋이 빠져서 미엘린을 졸졸 쫓아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만지작거려야 했다. 미엘린과 키스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냥, 그랬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내내 멍하니 있느라 데이지와 미엘린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오늘 데이지는 역사 교습 시간에 친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일을 자랑하느라고 바빴는데 말이다.
“정말 잘했어, 데이지. 하지만, 네가 다 맞지 못했어도 나는 기뻤을 거야.”
“왜요?”
“다 맞는 것보다 데이지가 그런 시험을 치를 만큼 준비했다는 게 더 기특하거든.”
데이지가 배시시 웃으며 음식을 냠 먹었다. 미엘린에게 충분한 칭찬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데이지가 이번엔 타겟을 바꿨다. 멍하니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반을 찌른 것이다.
“숙부님. 데이지가 시험에서 다 맞았는데요.”
“어, 어……. 잘했구나.”
데이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정도 했으면 아이반이 데이지를 꼭 끌어안고 잘했다고도 해 주고 뽀뽀도 해 주고 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시무룩해진 데이지를 대신해서 집사장이 넋이 나간 아이반을 일깨웠다.
“공작님?”
등을 찔린 아이반이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삐친 얼굴로 식사를 하는 데이지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미엘린이 보였다. 미엘린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이반에게 힌트를 베풀었다.
“얼른 끌어안고 잘했다고 해 줘요. 뽀뽀도 해 주고. 사랑한다고도 해 주고.”
미엘린의 속삭임에 아이반은 그제야 그걸 할 타이밍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지를 번쩍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고 뽀뽀도 해 주니 데이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잉. 숙부님이 이제 데이지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는 데이지를 꼭 끌어안은 아이반이 이마에 쪽쪽 뽀뽀했다.
“그럴 리가 있어? 우리 데이지 정말 똑똑하구나. 잘했어!”
“정말요?”
“그럼!”
“헤헤.”
기분이 좋아진 데이지가 아이반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금 평화를 되찾은 식탁을 보며 집사장이 미소 지었다. 미엘린이 고개를 내젓고는 식사를 지속했다. 아이반이나 데이지나 귀엽다고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