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다행히 심리 치료를 받은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악몽을 꾸는 일도 없었고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물론, 그사이에 에르긴을 마주치지도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김태진과 오지연으로부터 비롯되어 에르긴과 세리나를 거치며 내 안의 어둠은 사라진 게 아니라 똘똘 뭉친 채로 웅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여러 번의 심리 치료를 하는 동안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했다.
내가 괜찮다며 숨기고 싶어 했던 것들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덕분에 내가 보기에도 얼굴색이 훨씬 좋아졌다. 웃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항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게 내게 일어난 변화였다.
왕비가 시작해서 불러일으킨 유행은 빠르게 제도로 퍼져 나갔다. 자선 모금 연회를 할 즈음이 되었을 땐 이미 귀부인들이 코르넬의 명성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한국 사회나 이쪽 사회나 비슷한 것이 귀부인들은 바깥 활동보다는 집안을 돌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들과 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들이 마음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코르넬의 인기는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나는 꾸준히 아이반에게 접근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머릿속을 열어서 속에 든 걸 확인해 보고 싶은 1순위가 바로 세리나였다. 세리나와 마주칠 때마다 아이반은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내게 털어놓았다.
어제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손을 붙든 채로 세리나가 그를 밀어뜨려 함께 넘어진 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반이 목욕 3번 하는 거로 용서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반. 그것도 곧 끝날 테니.”
“뭔가를 할 생각인가요? 만약 그로 인해서 당신이 다친다면…….”
“아니요. 그들은 베푼 대로 돌려받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보송해진 아이반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속삭였다. 아이반이 내 등을 토닥였다. 목욕 3번을 했으면 쭈글쭈글해지기 마련인데 남자주인공은 역시 다른지 보송하기만 했다. 아이반에게서는 물 냄새와 뒤섞인 우드 향이 났다.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쫓아 고개를 움직였다.
아이반이 자세를 고치고는 내게 말했다.
“사교계에 또 안 좋은 추문이 번지고 있습니다. 후. 분명 처신을 제대로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붙이지도 않은 불이 연기를 만들어 내는 거죠.”
“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세상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들도 있는 법이니까요. 자, 아이반. 그만 생각하고 내게 집중해요.”
눈을 깜빡이며 아이반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목욕도 3번이나 했으면서 이대로 잠들 생각인가요? 정말로?”
“미엘린.”
아이반이 빼지 않고 내게 몸을 붙였다.
“어린애 같은 뽀뽀 한 번으로도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불평하듯 중얼거린 아이반이 깊어진 눈으로 내 얼굴에 키스를 흩뿌렸다. 도톰하게 부푼 입술에 파고들며 아이반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잠들지 않는 건 어떻습니까?”
아이반이 승부욕에 불을 붙이듯이 속삭였다.
“누가 먼저 잠드는지 보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좋아요. 누가 먼저 잠드나 봐요.”
내가 야근에 도가 튼 사람이야, 왜 이래.
그리고 나는 장렬하게 패배했다. 야근은 정신력이고 카페인이 내 정신의 8할을 지탱해 주기에 가능하다는 걸 깜빡했다. 게다가 아이반은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사람이었다.
* * *
“오늘은 뭐랄까. 얼굴이 매끈하네.”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그렇다고. 얼굴이 매끈한데 피곤해 보여.”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다. 내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니 크리스티나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시, 신혼이 다 그렇지!”
“누가 뭐라고 그랬어? 왜 혼자 발끈하는 거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내가 언제?”
고개를 홱 돌렸다. 말을 돌려야 하는데…….
“아. 내 살롱이 꽤 인기몰이를 하는 모양이야. 이 주 정도 예약이 꽉 찼다던데.”
“이야기는 들었어. 네가 귀족들의 니즈를 딱 맞춘 모양이던데.”
크리스티나의 칭찬에 어깨가 씰룩거렸다. 내 아이디어를 현실화했을 때의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내 사업이 번창할수록 에르긴의 예약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긴의 1 대 1 서비스는 곧 인기를 잃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귀족들은 저택에서 1 대 1 서비스가 아니라 거의 3 대 1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귀부인 한 명을 시중드는 하녀만 3명은 기본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색다르게 느껴졌을지라도 점점 흥미를 잃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좀 더 특별한 서비스였다. 저택에서는 누릴 수 없는 서비스. 나는 모든 인테리어에 현대적인 감각을 입혔다.
거의 중세 시대에 찾아온 외계인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색다름은 귀족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그치면 안 되지. 귀부인들만을 위한 수영장과 온갖 놀이 시설, 거기에 더해진 새로운 스포츠, 골프!
사실 현대의 골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저 공을 쳐서 홀에 넣는 기본적인 규칙만 가져왔으니까. 그래도 이게 히트를 친 건 사실이었다.
나는 골프를 스마트폰으로만 쳐 봐서 잘 모르지만, 현대에서도 골프를 치겠다고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럴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골프채를 좀 더 비싸게 만들었다. 귀족들에게 특별함의 인식을 제대로 심어 준 것이다.
덕분에 지금 살롱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아, 나. 사업적인 감각도 있나 봐. 왜 이렇게 완벽해?
“근데 그 살롱은 왜?”
“내일 자선 모금 행사로 지금은 비어 있단 말이지. 거기에서 골프를 쳐 보는 건 어때?”
“뭐……?”
“내가 주인인데 안 될 게 뭐 있어.”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 크리스티나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다. 크리스티나의 귀가 쫑긋했다.
“어때?”
“……좋아.”
어휴. 말 돌리는 데 성공했다. 놀림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단 말이지. 큼, 큼.
* * *
에르긴이 집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노백작으로부터 르웨긴 남자가 언제부터 사업을 시작하느냐는 재촉이 온 것이다. 처음에는 노백작이 너무 서두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에르긴도 조바심이 났다. 르웨긴의 남자가 연락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이틀은 바빠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그 날짜가 쌓여 가자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잠시 사고가 있어서 연락이 안 되는 거로 생각하는데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이번 일에 에르긴은 거의 전 재산을 투자했다. 그리고 에르긴의 재산만 투자한 게 아니었다. 에르긴을 믿고서 르웨긴의 남자에게 돈을 투자한 이가 드래곤 클럽에 가득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돈을 투자한 자들은 전부 드래곤 클럽에서도 실세라 불린다. 그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면 바로 퇴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르긴이 다리를 덜덜 떨었다.
“백작님.”
“연락이 됐나?”
날카로운 목소리에 보좌관이 고개를 저었다. 에르긴이 흙빛으로 변해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정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건 필시…….
‘아니야. 부정 탈 생각은 안 하는 게 낫지.’
에르긴이 자신을 다독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연락을 취해 보게. 기사들을 보내서 그자를 찾게 해.”
“네, 백작님.”
보좌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에르긴은 태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어그러졌음을.
그리고 보좌관 또한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괜히 에르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잘못하다가는 모든 불똥이 그에게로 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보좌관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백작님. 이제 떠나실 시간이 됐습니다. 살롱에서 연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가이스 님은 이미 도착하셨을 것이고 백작 부인께서도 아까 출발하셨습니다.”
“……그래? 가이스 그놈도 어쩌자고 돈맛을 들여서 말이야. 그러다가 추락하면 매우 아픈 법 아니겠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긴. 공작의 추락만 할까!”
에르긴이 눈을 빛냈다. 드래곤 클럽은 클럽이고 이건 이거다. 지금 에르긴에게는 목숨을 걸고 진행해야 하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준비하고 말했던 약은 어떻게 됐지?”
“이미…… 연회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에르긴이 즐거운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
‘당장은 여기에 집중하자.’
에르긴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오늘 연극을 위해서 에르긴은 완벽해야 했다. 에르긴이 살롱으로 가는 마차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