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말쑥하게 차려입은 하인이 신분 패를 내밀었다. 오늘 살롱의 경비를 맡은 기사들은 일하기로 계약된 자임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긴장된 얼굴로 하인이 살롱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잠깐.”
인체스터 가문의 옷을 입은 기사가 하인을 막아섰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하인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배앓이를 해서 늦게 왔습니다. 분명 안에서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나도 당신을 찾고 있었거든. 왜 이렇게 늦었나.”
기사가 빙긋 미소 지었다.
“예? 저, 저를요? 저를 왜…….”
“왜 그렇게 죄지은 것 같은 표정으로 다니나그래. 내 주인께서 자네를 보고자 하시니 따라오시게.”
기사가 하인의 등을 떠밀렸다. 기사의 힘을 이기지 못한 하인이 떠미는 대로 움직였다.
“대, 대체 누가…….”
“쉿. 그렇게 겁이 나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하인의 신병을 확보한 기사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체스터의 기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와 하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는 크리스티나였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굳이 사지로 걸어 들어오는구나. 너는 무서운 것도 없느냐?”
크리스티나를 알아본 하인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심장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세차게 뛰어 댔다. 소매에 숨기고 있는 가루를 들킨 것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크리스티나가 부채로 하인을 가리켰다.
“굳이 긴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인체스터의 기사가 바닥에 엎드린 하인을 강제로 일으켰다. 기사가 하인의 옷을 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약이든 종이봉투가 툭 떨어졌다. 하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크리스티나는 미소 지었다.
“이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왕성 경비대에 넘기면 된다. 왕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야.”
“예, 아가씨.”
하인이 입을 떡 벌렸다. 왕도 관련되어 있었다고?
그저 약만 타면 돈을 준다길래 가볍게 생각한 일이었다. 독약도 아니라 그저 수면제일 뿐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상황을 파악한 하인이 기사를 뿌리치고 크리스티나에게 매달렸다.
“후회할 짓은 말았어야지.”
크리스티나의 턱짓에 울부짖는 하인의 입이 틀어막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자리가 정리되었다.
* * *
나와 크리스티나가 준비한 자선 모금 연회는 이번에도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크리스티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직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한 왕비는 선물을 보내 왔다. 거액을 모금했을 뿐만 아니라 코르넬을 보낸 것이다.
코르넬을 왕비의 이름으로 참석하게 해 좀 더 그녀에게 명성을 더해 준 것이다. 아직 색안경을 쓰고 보는 기성세대도 많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고운 시선으로 코르넬의 심리 치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비를 움직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 아이반 덕분이기도 했다. 아래서부터 움직였으면 힘들었을 일을 위에서부터 움직이니 금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코르넬이 피운 은은한 향기가 살롱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큰 목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가이스를 턱짓했다.
“준비는 끝났어.”
크리스티나가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응. 약을 빼돌려서 로시에에게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잖아. 하인은 왕성 경비대로 넘어갔을 거야. 언제 시작할까?”
에르긴은 지금쯤 제 뜻대로 되어 간다고 생각하겠지?
“이제 곧 해야지.”
내 손짓을 본 로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직접 가이스에게 서빙했다. 이 일을 위해서 로시에를 잠시 살롱에 고용한 것이다. 가이스가 로시에가 직접 서빙한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창 돈 많은 귀족 놀음을 따라 하는 것에 재미가 들린 가이스는 의심 없이 차를 마셨다.
크리스티나도 그 모습을 목격했는지 혀를 작게 찼다. 어떻게 보면 가이스는 에르긴에 비해서는 순박한 편이었다. 아주 순수하게 돈만 탐하고 있으니.
가이스가 차를 마시는 것을 확인한 로시에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무대에서 내려갔다. 정확히 목구멍을 타고 액체가 넘어갔다는 의미다. 로시에의 차는 오로지 가이스에게만 서빙되었다.
“세리나는?”
“기다리는 중이야.”
꽤 기대된다. 오늘이 지나면 세리나가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에르긴도 마찬가지고. 에르긴이 이 일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한동안은 사교계에 기별하지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와 크리스티나가 눈을 마주치고는 악동처럼 웃었다. 어릴 적 시장통을 쏘다니며 하녀들을 따돌렸던 시절의 미소였다.
* * *
아이반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불러낸 것은 스타티스였다. 스타티스가 서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아이반에게 르웨긴 남자를 잘 빼돌렸다고 말했다.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을 거라고.
“그래?”
스타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인 돈은 어떻게 했지?”
“일정 부분은 말씀하신 대로 르웨긴으로 돌아가는 남자에게 여비로 쥐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금액은 왕성으로 보내 두었습니다.”
“잘 처리했군.”
공교롭게도 그 모든 것이 처리된 게 오늘이었다. 미엘린이 지금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하필이면 겹친 것이다. 에르긴에게는 엎친 데 겹친 격이겠지. 그리고 에르긴은 모든 걸 한 번에 잃게 되는 것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타이밍이었다.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왕성에서는 아직 답변이 없었나?”
“내일 입궁하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꼭이라고 당부하라고 하시더군요.”
“기분이 좋은가 보군.”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정복지부를 만들면서 거액을 쓴 헨리로서는 갑작스럽게 불어난 재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돈의 명목은 ‘틸리언즈로부터 온 거액의 기부금’ 정도였다. 종종 왕과 유대 관계가 깊은 가문에서 대가를 받고 돈을 기부하기도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곧 구색 맞추기 용으로 왕으로부터 피드백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미엘린에게도 전하게. 분명 좋아할 거야.”
“예, 공작님. 오늘 같은 날에 특히 더 잘 어울리는 소식이 되겠네요. 이 연회가 공작 부인께서 준비하신 것 아닙니까.”
아이반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보기 싫은 낯짝을 한동안 볼 일 없게 되었다는 게, 아니.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 기뻤다. 물론, 그 기쁨은 미엘린의 안전과 평화로부터 기인했다.
스타티스가 자리를 뜨고 잠시간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한동안 자꾸만 부딪히며 접점을 만들려고 하는 세리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 여자 덕분에 목욕을 하도 해서 이제는 살갗이 거칠어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질겁을 하는 미엘린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반이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자꾸만 미엘린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힘들게 하는 에르긴이었다. 바퀴벌레처럼 어디든 안 가는 곳이 없었다. 분명 오늘도 나타날 것이다.
아이반은 크리스티나에게 한순간도 미엘린에게 떨어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괜한 걱정이기를 바라지만…….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만 무사히 보내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아이반이 다시 살롱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공작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리나였다.
그것도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눈이 풀려서 비척거리며 걷고 있는 세리나.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목욕을 몇 번이나 해야 하지?’
* * *
드디어 세리나가 나타났다. 엉망으로 나타날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오늘 연회는 술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취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세리나를 보자 얼른 비켜섰다.
“아이반! 어디 있어, 아이반!”
안 그래도 세리나를 마주친 듯 하얗게 질린 아이반이 고개를 내저으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저 여자가 드디어 미치기라도 했나 봅니다.”
아이반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격앙되어 있었다. 옷이 이리저리 뜯긴 것으로 보아 세리나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 같았다.
“아이반, 괜찮아요?”
“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미엘린은 괜찮아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그리고 사건은 지금부터 벌어질 예정이었다. 세리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아이고, 미엘린……!”
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저 주둥이에서 내 이름이 또 왜 나와?